11월 1일!
이 날을 위해 무려 한 달이나 기다렸다.
교수님들 외래진료 시간이 제각각임에도 하루에 무려 3곳의 진료 예약을 한 날이기 때문이다.
오전 내분비내과,
오전과 오후 사이 알레르기 내과,
오후 신경정신과!
회사에 제발 갑작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휴가를 내리라!!' 다짐했다.
정신과 약을 먹은 후엔 늘 잠에 취해 있기 때문에 최근에 운전을 하지 못한다. 시야도 뿌옇다.
단단히 준비물을 챙기고 출퇴근용 지하철이 아닌 마을버스를 탔다. 오랜만이었다.
나의 준비물은 딱 세 가지다. 운동화, 블루투스 이어폰, 생수 한 병!
대학병원에서 내분비 및 알레르기 내과 진료를 끝낸 후
남은 한 곳의 병원으로 향했다.
오후 진료까지는 시간 여휴가 있어서 마을버스를 타지 않고 걸었다.
1990년대 히트 발라드를 들으면서 걷다 보니 인도에 떨어진 낙엽이 보였다.
낙엽! 고개를 들어 나무를 보았다. 오랜만에 하늘도 보였다.
가을이구나!
지하철과 바로 연결된 곳에서 근무를 한 탓에 하마터면 가을을 느끼지 못할 뻔했다.
아픈 덕분에 가을을 느낄 수 있으니 병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마음껏 여유를 부리며 느릿느릿 걸었는데도 예약시간까지 시간이 남았다.
여느 때였다면 걷는 것조차 귀찮아서 일찍 병원에 갔을 것이다.
병원 대기실에 멍하게 졸고 있었겠지만 오늘은 올해 들어 처음으로 인식한 가을을 더 느껴보고 싶었다.
병원이 있는 건물 1층 입구에서 발길을 돌렸다.
뜬금없이 서점에 가고 싶었다.
2주일에 한 번씩 다니는 공공도서관이 아닌 서점에 가서 아무도 손 타지 않은 새 책들을 보고 싶었다.
많이 읽지도 않는 종이책의 냄새를 흠뻑 맡고 싶었다
특별히 사고 싶은 책 없이 멍하게 있다가 즉흥적으로 마음에 꽂히는 책을 마구 사고 싶었다.
책 구경을 하다가 뒤늦게 온 친구와 재잘거릴 때가 그리웠다.
스마트폰에서 주변 지도를 검색했지만 서점은 없었다.
이 부근에 대형서점이 두 군데나 있었는데 모두 없어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하긴 나 같은 문명에 뒤쳐진 아줌마조차 전자책 리더기를 통해 자기 개발서를 보고,
브런치라는 어플을 통해 에세이를 본 지 꽤 됐으니
서점이 점점 없어지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종이책이 주는 클래식한 느낌은 분명히 있다.
e-book리더기,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것과 달리
인터넷 검색, SNS이 아닌 정말 '독서'라는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는 만족감도 있다.
리더기는 클릭 한 번으로 좋은 문구들을 가볍게 북마크 할 수 있다.
하지만 종이책은 형광펜으로 줄 긋고, 인덱스를 붙이고, 필사해야 돼 그 구절을 반복해서 읽게 된다.
그래서 소설, 시처럼 글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감동을 마음속에 각인시키는 대는 종이책이 제격이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병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새 종이책이 많은 서점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날이 지나갔다.
여기저기 다양한 섹션을 목적 없이 걷다가 좋은 책을 발견하고 싶은 날이 지나갔다.
일하다가 문득, 내 아들의 살 냄새가 그리워지는 것처럼
새 종이책이 가득한 서점 특유의 향기가 참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