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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노트

툭 치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밝은 밤>

by 이서진

책 제목 : 밝은 밤

저자 : 최은영

출판사 : 문학동네


"내게는 지난 이 년이 성인이 된 이후 보낸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절반 동안은 글을 쓰지 못했고 나머지 시간 동안 <밝은 밤>을 썼다. 그 시기의 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누가 툭 치면 쏟아져 내릴 물주머니 같은 것이었는데, 이 소설을 쓰는 일은 그런 내가 다시 내 몸을 얻고. 내 마음을 얻어 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 작가 최은영 -

2022년은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과 함께 보냈다.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물주머니 같다고 자신을 표현할 정도의 감정을 글로 토로한

최은영 작가님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2022년 봄, 이 책을 처음 알게 됐다. 코로나 입원병동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았던 2022년 봄. 자신의 세가 약해지는 것이 아쉬웠던 듯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람들 속으로 무섭게 전파됐고 확진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안타깝게도 우리 가족은 모두 코로나에 감염됐고, 기관지 천식과 류머티즘을 앓고 있던 나는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코로나 병동 입원을 위해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단, 30분! 면회는커녕 노트북 반입마저 안되며 최악의 경우 퇴원할 때 환자가 사용했던 물건 전부를 버릴 수 있다는 보건소 직원의 안내에 따라 최소한의 물건만 챙겼다. 방역택시 도착 예정시간에 맞춰 약속된 장소에서 대기해야 됐다. 생각보다 준비시간이 매우 촉박했다. 소설 <밝은 밤>은 활자가 그리울 때 보려고 급하게 챙긴 책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최은영 작가님께는 무척 죄송하지만 그렇게 이 책을 읽게 됐다.

코로나 병동 생활은 매우 규칙적이었다. 정해진 시간마다 체온과 혈압, 산소 포화도를 측정하고 그 결과를 간호사실에 통보해야 됐다. 3인실이었지만 대화 및 병실 출입이 금지됐으며 심지어 환기조차 할 수 없었다. 회사와 집을 떠난 입원 생활! 갑자기 모든 관계가 차단된 채 오로지 나와 일주일을 보내야 되는 고독한 시간이었다. 정해진 치료 외 자의로 할 수 있었던 건 독서뿐이었다. 덕분에 평소 책 읽는 속도가 매우 느렸던 나도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은 단 하루 만에 다 읽을 수 있었다. 하루 만에 한 권의 책을 다 읽었다는 자체로도 신기했지만 더욱 신기했던 것은 두 번째 읽을 때의 느낌이었다. 남은 책장이 얇아지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접하는 경험이었다. 193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 번도 힘들지 않았던 시간이 없었던, 애달픔으로 꾹꾹 찬 소설 속 시간! 그 버거운 시간을 담고 있는 소설을 단번에 읽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등장인물의 감정을 최대한 오랫동안 느껴보고 싶었다. 한 구절을 읽은 후 한참 동안 생각했다. 똑, 똑, 똑, 똑, 똑! 2초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수액을 보며 새비의 마음을 생각하고 간호사에게 채혈을 당하면서 삼천이의 슬픔을 떠올렸다. 바다가 있는 ‘희령’이라는 장소! 침대에 누운 채 상상 속에서 여러 번 가봤다. 그렇게 단번에 읽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입원 기간 열흘 동안 세 번을 읽었다. 그리고 퇴원 후 두 번을 더 읽었으니 총 다섯 번! 영화도 아닌 똑같은 책을 이렇게 읽은 건 처음이었다.


소설 <밝은 밤>의 매력이 무엇이기에 나를 여러 번 몰입하게 만들었을까? 일제 강점기 및 한국전쟁을 지나 근현대사까지. 지독하게 고단했던 시간을 함께 보낸 두 여인의 우정이 부러웠던 것일까? 아니면 힘든 시기를 버틴 후 형편이 나아진 희자를 자신도 모르게 멀리 대했던 영옥의 인간적인 마음에 공감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삼천의 증손녀 딸 지연이 자신의 뿌리를 찾고 마음의 상처를 찾아가는 과정에 마음이 끌렸던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백정의 딸이었던 이유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무시당했던 삼천이 그 옛날 장애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놀림받았던 나의 과거를 떠올리게 했던 것일까?


삼천의 증손녀 지연의 사연으로부터 소설은 시작한다. 남편과의 이혼으로 마음이 피폐해진 지연은 새로운 삶을 위해 ‘희령’으로 직장과 집을 옮긴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20년도 넘게 연락이 끊어졌던 외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어색하게 시작된 외할머니와의 왕래 속에서 지연은 증조모 삼천과 새미의 얘기를 듣게 된다.

때는 일제 강점기. 지연의 증조모 정선은 삼천이란 곳에서 백정의 딸로 태어났다.(정선의 고향이 삼천이라 소설에서는 ‘삼천’으로 불린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마저 병으로 누워있어 희망이라곤 없을 것 같은 집구석. 어린 삼천은 옥수수를 팔며 생계를 겨우 유지하던 중 일본으로 팔려 갈 위기에 처한다. 젊은 여자라면 일본으로 잡혀가고 팔려 가던 시절, 특히 아버지나 오빠, 삼촌 등 집에 남자 어른이 없는 삼천은 주인이 없는 여자로 인식됐기 때문에 더 위험했다. 그런 삼천을 구해준 사람은 삼천의 남편 즉, 지연의 증조부였다. 의협심에 불탔던 증조부는 백정의 딸과는 혼인할 수 없다는 부모님을 뒤로한 채 삼천을 개성으로 데리고 갔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증조부는 증조모 삼천을 보듬어주지 못했다. 삼천이 백정의 딸이라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때도, 딸 영옥을 낳았을 때도 증조모를 외롭게 했다. 내 마음을 알려고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 삼천은 그가 옆에 있어서 더 외롭게 느껴졌을 것이다.


외로운 삼천에게 힘이 돼 준 사람은 ‘새비’였다. 새빈은 삼천이 남편을 따라 개성에 오느라 버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아픈 엄마를 돌봐준 평생의 은인 ‘새비 아저씨’의 부인이었다. 삼천은 백정의 딸이었던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냉대에 상처받은 채 새비를 만났다.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원래 자신의 모습을 알고 나면 멀어져도 당연하다는 체념으로 시작된 관계는 얼마나 애틋하고 소중했을까.

“ 꽃을 봐도 풀을 봐도 네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됐어. 별을 봐도 달을 봐도 그걸 올려다보던 삼천이 네 얼굴만 생각 나.”
- 새비가 삼천에게 보내는 편지 중 -

삼천과 새비의 우정·자매에는 소설 속 주요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우정’은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나오는 ‘친구와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과는 그 깊이가 다르다. 그 두 여인은 수 십 년 동안 서로의 시간을 채워준 사람들이고 상대가 힘들 때 무너지지 않게 지켜준 사이다. ‘나에게 저런 친구가 있었던가? 나는 누군가에게 저런 사람이 돼주었던가?’라는 질문을 해본다. 삼천과 새비는 나를 반성시키고 관계에 굶주리게 만드는 인물들이다.


나처럼 ‘관계’에 대해 굶주리는 독자들이 삼천과 새비의 관계를 부러워하다가 현실에 있을 수 없는 관계라고 치부할까 걱정했던 것일까? 작가는 그 둘의 관계에 현실성을 불어넣었다. 누구나 갖는 분노, 시기, 부러움 등으로 타인을 외면하고 운명을 저주하는 마음을 소설 속 인물에게 투영했다.


첫 번째! 신과 운명을 원망하는 마음이다.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 간 남편이 히로시마 원폭의 후유증으로 죽자 새비는 신을 저주하기 시작한다.

“천주님, 그때 뭐하고 계셨어. 어린아이들, 죄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찢겨 죽어가는 동안 뭐 하고 계셨더랬어.”

병으로 고통받다 죽은 남편을 바라본 아내는 착하고 성실하게만 살았던 남편의 인생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결국 새비는 독실한 천주교였던 남편의 종부 성사를 거부한다. 실망감에 기인한 분노와 원망! 성실하게 천주님을 섬기고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애썼던 남편과 죄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관망한 신에 대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당연한 감정일 것이다.


두 번째! 나의 삶과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소중한 사람의 성공과 행복을 외면하는 마음이다. 분명히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고 함께 배곯으며 고생했던 사람이었는데...... 이미 저만치 멀리 가버린 상대방에 비해 여전히 저 뒤에 남겨진 자신을 초라하게 생각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삼천의 딸 영옥과 새비의 딸 희자의 관계가 그러하다. 영옥과 희자는 어릴 때 그 누구보다 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한국전쟁 후 정착 과정은 각자에게 다른 인생을 살게 했다. 영옥은 이른 나이에 결혼하고 출산했지만 희자는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에 입학했다. 영옥은 자신의 엄마 삼천을 외롭게 했던 아버지와 다를 게 없는 남편을 만나 이른 나이에 결혼한다. 영옥은 남편과의 사이에서 딸(미선, 지연의 엄마)을 낳지만 남편은 한국전쟁 전 이미 결혼해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고 결국 영옥과 어린 미선을 떠나 원래의 가족에게로 돌아간다. 어린 딸과 함께 남겨진 영옥은 명문고, 명문대에 입학해 신여성으로 살고 있는 희자를 점점 외면하게 된다.

가끔씩 희자가 편지를 보내왔지만 영옥은 거의 답장하지 않았다. 희자에게 글을 쓰다 보면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고,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질수록 마음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어렴풋이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들이 글을 쓰는 동안 분명해졌는데, 그건 영옥의 일상을 위협할 뿐이었다.

영옥은 자신이 과거에 묶인 사람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의 기저귀를 빨고, 아이에게 젖을 주고, 아이를 목욕시키고 놀아주면서 영옥은 자신이 만든 작은 세계 속에서 만족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내가 속할 수 없는 세상은 알고 싶지 않았다. 그 세상은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속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온 나의 노력을 한순간에 하찮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가사노동과 육아로 바빠서 희자에게 답장하지 못할 뿐이라는 영옥의 자기 합리화가 충분히 이해됐다. 내가 다치면 모든 게 끝이니까. 내가 끝나면 내 새끼도 끝이니까. 남들이 보기에 초라 해 보일 수 있겠지만 나와 내 가족에게 전부인 나의 자존감은 누가 뭐래도 스스로 지켜야 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장애인인 내가 남편과 결혼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크고 작은 어른들의 걱정들로 남편과 잠시 헤어졌을 때가 있었다. 영화에서처럼 실연의 아픔을 이기기 위해 여행을 가거나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내 마음과 상관없이 출근했고 민원에게 욕을 들었다. 나에게 아무 의미 없는 각종 자료들을 공장처럼 찍어내야 되는 시간이 지겹게도 계속됐다. 그러던 중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결혼을 하게 됐다며 내게 청첩장을 건네주었다. 결혼 후 남편과 함께 출국하여 영국에서 함께 공부하며 살 것이라고 했다. 여러 가지 부러웠다. 당시에 나는 할 수 없었던 결혼을 한다는 것 자체도 부러웠지만 일을 하지 않고 공부만 해도 되는 경제적 형편도 무척 부러웠다. 몸도 마음도 지쳤던 나는 친구를 축하해 줄 여유가 없었다. 그때가 몇 월이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날짜는 기억난다. 정확히 25일이었다. 기초연금이 나오는 날. 이른 아침부터 기초연금 입금이 언제 되냐는 어르신들의 항의 전화를 받던 내 눈에 들어온 건 친구의 청첩장이었다. 수화기에서 각종 욕설이 들릴수록 더 멍해졌던 기억이 난다. 나는 결국 일이 있다는 핑계로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결혼 후 보내온 이메일에 답장하지 않았다.


이 일이 내내 마음이 걸렸는데 영옥의 마음을 읽다 보니 죄책감이 덜 해 지는 것 같았다. 역시, 나만 속이 좁은 게 아니었다. 영옥이라면 남에게 말하기 왠지 치사하고 부끄럽지만 분명히 속상한 그 마음을 알아줄 것 같았다.


영옥은 희자를 외면하는 과정에서 피난 중 자신을 아껴주고 바느질을 가르쳐주셨던 명숙 할머니도 함께 잊으려고 애썼다. 행복하고 사랑받던 시절은 절대로 떠올리지 않겠다는 듯.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아이와 가사에 집중했던 영옥. 남편의 중혼 사실을 알고도 화조차 내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을 몰아붙였다. 희자가 아픈 엄마를 두고 대학에 다녀야 되는지 모르겠다며 푸념할 때도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이 널린 세상에서 배가 불러서 약한 소리를 하는 거냐며 생각했던 영옥이 오히려 나는 이해됐다. 당신의 마음이 유독 좁은 게 아니라는 것을 꼭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 자신과 가족을 위해 친구를 외면하는 마음이다. 한국전쟁 시절, 초등학교에서 주민 열 명이 모두 총살되는 일이 있었다. 사상범으로 오해받으면 누구든 죽게 되는 끔찍한 시절이었다.

삼천은 사람들이 한 사람에게 총을 여러 번씩 쏘는 장면을 무기력하게 바라봐야만 했다. 소리를 지르거나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됐으므로, 감정 없는 사람을 연기하며 나무처럼 서 있어야 됐다. 남편이 죽은 후 홀로 시댁에서 딸 희자를 키우던 새비는 자신의 친정 오라버니가 사상범으로 오해받아 죽게 되자 시댁에서 쫓겨나게 된다. 갈 곳 없는 두 모녀는 어렵게 삼천에게로 왔지만 환대받지 못했다. 삼천이는 마음 같아서는 새비에게 개성에서 함께 지내자고 하고 싶었지만 혹여나 새비 때문에 자신의 삶에 불똥이 튈까 봐 두려워했다. 사상범으로 죽은 사람의 동생을 숨겨줬다는 게 발각되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없어지는 시대였으니까. 그렇게 며칠 만에 새비를 쫓아내듯 한 삼천은 새비를 외면했다는 것이 평생 마음의 빚으로 남았다.

새비 너를 그 추운날 난리통에 피난 가라고 떠밀었을 때...... 모두 다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기렇게 마음먹으면서두 기래선 안 됐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새비 역시 삼천이 미안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상범으로 오해받는 것은 그만큼 끔찍했으니까. 그래서 삼천이네에 더 머무려고 하지 않고 홀로 어린 딸을 데리고 대구로 피난하기로 마음먹는다.

“개성에서 새비 너레 피난을 갈 적에......”
“안다.”

새비 아주머니가 증조모의 말을 끊었다.

“안다. 안다, 삼천아.”

새비 아주머니는 증조모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도움을 구하러 개성에 온 새비 모녀를 쫓아내듯 피난길로 내몬 일을 증조모가 내내 미안해하고 있었음을.


잔인한 역사 때문에 붙잡을 수 없고, 머물게 해 달라고 애원할 수 없는 마음은 수 십 년이 지난 후에야 녹게 된다.


이렇듯 작가는 소설 속 인물을 통해 독자를 안심시킨다. ‘역시, 내가 그렇게 속이 좁은 사람이 아니었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리하여 죄책감을 덜고 나와 똑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책을 덮는 순간, 소설 속 한 구절이 떠올랐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닌 얼어붙은 강물이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순차적이지 않은 한 순간에 있다. 미리 정해진 것이다.

미리 정해진 것! 어쩌면 삼천과 새비의 관계도 처음부터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본모습을 알면 언제든지 멀어져도 상관없다고 시작했을 때부터. 형편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관계까지도 이미 정해졌던 것 같다. 삼천과 새비, 그리고 영옥과 희자 중 누군가의 노력이 부족해서도 아닌 그저 그렇게 정해졌을 뿐이다.

북에서 온 가족을 따라 속초로 갔던 할아버지에게 버림받았던 할머니(영옥)의 사연 속에서 지연은 깊이 공감한다. 지연은 남편에게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슬프고 버림받은 마음을 할머니와 함께 아파하며 서서히 치유한다. 이렇듯 ‘남편의 외도, 이혼’이란 지연의 상처가 엄마 미선, 외할머니 영옥, 증조모 삼천의 사연을 통해 치유될 것이라는 것도 정해진 것은 아니었을까?


받아들임, 체념, 정해짐, 숙명(宿命)! 모든 것이 정해졌다면 과연 사람의 노력은 설 자리가 없는 것일까? 이런 원론적인 고민의 흔적은 소설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 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중략) 찰나에 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


하지만 작가는 미래가 정해졌다는 것이 무기력하게 살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곳에 쓰일 열정을 삶으로 집중시킨다. 허황된 기대에 삶을 허비하지 말고 매 순간 진지하고 겸허하게 살아야 된다고 알려준다.

그녀(삼천)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빠르게 포기하고 체념하는 게 사는 법이라고 가르쳤다. 삶에 무언가를 기대한다고? 그건 사치이기 전에 위험한 일이었다.
- 오늘 지나가는 길에 맞았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 나는 혼자 슬퍼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 탓인지 난 어릴 때부터 혼자 질문을 하고 답을 찾는 놀이를 좋아했다. 그중 가장 많이 한 질문은 ‘왜 난 인간으로 태어났을까?’ 혹은 ‘나는 왜 장애인으로 태어났을까?’라는 것이었다. 애초에 나의 하찮은 노력 따위는 완전히 배제된 결론을 둔 질문에 답이 있을 리 만무했다. 숙명(宿命)일 뿐이라고 단념했다가도 답이 없는 그 질문들은 매 순간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매 순간 애쓰고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이 소설을 본 후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 나는 장애인으로 태어났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그래서 사람들 속에서 외로움을 줄곧 느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오늘도 괜히 속상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만 인지하고 그 일에 대한 감정은 배제하는 것. 바뀔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체념하니 훨씬 마음이 편해졌다. 기쁜 일이 생겼다고 지나치게 들뜨지 않고 슬픈 일이 생겼다고 땅이 꺼지도록 낙담하지 않게 됐다. 감정과 자기 연민을 걷으니 훨씬 홀가분하게 지금의 삶을 살 수 있게 됐다.

‘밝은 밤’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무사히 도착하기를, 자신만의 생명으로 누군가의 마음에 잠시나마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내 역할은 작가의 말을 쓰는 지금 여기까지인 것 같다. 책은 책의 운명을 살 것이다. <작가의 말>

<작가의 말>에 적힌 마지막 구절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누가 툭 치면 쏟아져 내릴 물주머니처럼 힘든 시간을 보내며 몸과 마음을 다시 얻어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듯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최은영 작가는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인지했다. 작가와 책을 구분하였다. 작가의 삶에 집중하기 위해 완성된 작품과 거리를 뒀다. <작가의 말>은 자칫 낭비될 열정을 집필에만 집중하는 작가의 태도에 관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가볍게 접했던 소설 <밝은 밤>은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이었다.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 힘들었던 순간을 떠올려야 했던 소설 속 지연처럼 나 역시 아팠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4대에 걸친 이야기를 통해 인생의 허무함과 삶의 무게를 함께 느끼며 지치고 힘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소설책을 잠시 덮기도 했지만 삶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보기 위해 결국 다시 책을 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점이 소설 <밝은 밤>의 매력인 것 같다. 때로 힘들지라도 상처를 대면한 후 아픔을 극복했던 지연처럼 나 역시 단단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서로의 아픔이 무거워 끊고 외면했던 인연이더라도 다시 만나진다는 것을 믿게 됐다. 삼천의 증손녀 지연이 인연이 끊어졌던 희자와 영옥을 다시 이어줬 듯.


이 독후감을 끝으로 소설 <밝은 밤>을 잠시 손에서 놓게 되겠지만 언젠가 이 책을 다시 찾게 될 것 같다. 아이가 자랐을 때, 부모님이 편찮으실 때,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이 책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삼천과 새비 그리고 영옥과 희자, 지연이 언제든지 나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현답을 줄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든든하고 진중하게 내 곁에 있어 줄 것 같다.


끝으로 소설 속 가상의 공간인 희령! 희령은 삼천의 증손녀 딸 지연이 3대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증조모를 만날 수 있었고, 이십 년 간 연락 없이 지냈던 자신의 엄마와 외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남편의 외도로 이혼 후 피폐해진 지연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준 위로의 장소다. 가상의 공간이기에 누구라도 언제든 갈 수 있는 희령을 많이 그리워할 것 같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마음의 장소를 만들어 준 작가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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