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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노트

그러한 까닭을 알지 못하는, <오십에 읽는 장자>

by 이서진

책 제목 : 오십에 읽는 장자

저자 : 김범준

출판사 : 유노북스


공자는 <논어>에서 40세에 이르면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두 단어, 불혹(不惑)! 공자의 말에 의하면 저는 그야말로 나잇값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제 나이 마흔 하고도 한 살 더 많은 마흔한 살! 전 여전히 세상일에 혹합니다. 타인이 저를 굳이 유혹하거나 흔들지 않는데도 혼자서 참 갈팡질팡, 흔들흔들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이 나이 먹도록 이렇게 심지가 약하다니'라고 자책하던 중 따뜻하고 관용적인 '장자'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바로 이 책, <오십에 읽는 장자>입니다. 나이가 마흔이 되도록 사람을 사귀는 게 부끄러워 일 년을 고민하다 뒤늦게 가입만 하고 한 번도 나가지 못한 독서 모임에서 ‘이달의 책’으로 선정 된 덕분입니다. 우연히 읽게 됐지만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이 책을 지금 알게 됐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됐습니다. 마음에 닿는 문장이 있으면 띠지를 붙여봤습니다. 책을 다 읽은 후 띠지가 덕지덕지 붙은 책 옆면을 보니 오랜만에 열심히 공부한 것처럼 뿌듯함이 느껴졌습니다.

이 책은 큰 깨달음을 주는 반면에 스토리는 없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독후감도 편하게 적히네요.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말라는 장자 선생님의 가르침처럼 이번 독후감은 제 생각보다 장자 선생님과 작가님의 좋은 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마음이 어지럽고 힘들 때 한 글자, 문장 한 줄에 담긴 뜻을 생각할 수 있도록 말이죠.


1. 마흔에서 오십까지는 인간이 성숙을 완성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책의 본문이 시작되기 전, 프롤로그에서부터 작가는 저를 안심시킵니다. 마흔 살의 성숙을 전제로 한 '불혹(不惑)'이라는 짧지만 무거운 단어에서 저를 해방시켜 준 것 같았습니다. 제가 특별히 모자라서 성숙을 완성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아직 십 년이 더 남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처럼 느끼게 해 준 마법의 문장! 이 문장은 도입부임에도 긴장감과 죄책감으로부터 이미 저를 자유롭게 만들어줍니다.



2. 쓸모가 없기에 고통 없이 편안하다.

무소가용 안소곤고재(無所可用 安所困苦哉)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몸도 성치 않고 사교적이지 못하고, 특별한 기술도 없는 탓에 남들이 기피하는 일, 허드렛일이 제게 주어져도 거절할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 정도는 해야지 저의 역할을 다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자리를 찾고자 참 많이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최소한의 역할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었는지, 버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마흔이 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제가 잘 어울릴 수 있는 건 저의 노력과 크게 상관없다는 것을 말이죠.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색안경을 끼고 저를 미리 차단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대수롭지 않은 듯 제게 먼저 다가와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월급쟁이로서 주어진 일을 하고, 아내와 엄마로서 역할을 할 뿐이지 어느 집단에 소속되거나 중요한 위치를 얻고자 노력하지 않으렵니다. 이제 저의 쓰임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이미 제 곁에는 저를 사랑해주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튼튼한 소와 병약한 소 두 마리를 가진 농부가 있다면 그 농부는 건강한 소에게 쟁기를 채울 것이다. 이처럼 신은 건강하고 바르게 사는 자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한다. -탈무드-”


장자와 탈무드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중요한 곳에 쓰이지 못한다는 사실에 서운해하지 않고 저 대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 옆 사람에게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대신에 짐을 짊어지는 그 사람이 다음에 쉴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3. 성인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대신 하늘의 이치를 따른다.

성인불유 이조지어천(聖人不由 而照之於天)


이 책에 나오는 좋은 글 중 가장 마음에 와닿은 구절입니다. 길을 걷거나 회사에서 일할 때, 남편과 대화할 때 뜬금없이 이 구절이 생각날 때가 많았습니다. 그만큼 제가 '시시비비'를 가리며 살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빠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머, 쟤는 왜 저럴까? 그게 아니고 이게 맞지요!’ 등 좁은 제 식견으로 세상을 판정하고 아집을 부리며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지 '아, 그런가 보다'라고 넘기는 것을 목표로 한 날이 많았지만 성공한 날은 없었습니다. 그러기엔 제 인격이 너무 모자란 것 같습니다. 잘 버티다가도 이해타산이 얽혀있는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시시비비를 따졌습니다. 특히, 저와 상관없는 일이면 '그런가 보다.'라고 넘길 수 있지만 타인의 행동으로 인해 제가 조금이라도 수고스러워진다면 곧바로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우는 유치한 제 모습이 자각됐지만 멈출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을 조금이라도 적게 움직이고, 제 돈을 조금이라도 적게 쓰고, 제가 조금이라도 적게 상처받고, 일을 적게 하거나 책임의 범위를 줄이기 위해 따지고 묻고, 판단하는 게 이미 습관이 됐습니다.


뭐, 난 '성인(聖人)'이 아닌 '범인(凡人)'이니까 당연한 것이라고 변명해보지만 참, 궁색합니다.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따지는 '옳고 그름'은 절대적인 기준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책에도 이와 관련된 글이 있습니다.


가능했던 일이 곧 불가능해지고 불가능했던 일이 바로 가능해지기도 하며, 옳음을 따르다가 그름을 따르고 그름을 따르다가 옳음을 따른다고도 합니다. 시시비비를 따지던 지난날을 비추어보면 생각할 거리가 많은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시시비비를 가르는 기준은 그 당시 저의 이익에 기준한 것일 뿐 제 상황이 바뀌면 그 기준 역시 바뀝니다. 위 문구처럼 시시비비를 따지던 지난날을 부끄러워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라며 후회하지 않도록 그대로 그 일을 받아들일 뿐 판단하지 않도록 애써야겠습니다.


- 시비를 따지면 모든 사람에게 긍정하는 답이 나오는가? 물론 그 대답 역시 '아니다'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 시시비비를 가리는 과정에서 오히려 대립과 갈등만 증폭시킨다.

- 그렇게 할 뿐 그러한 까닭을 알지 못하는 것을 도라고 말한다.

인시이 이이부지기연 위지도(因是已 已而不知其然 謂之道)

-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 알지 못하겠다.

이미지유무지과숙유숙무야(而未知有無之果孰有孰無也) :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 것

- 시비를 가리는 건 웃어넘기는 것만 못하다.

조적불급소(造適不及笑)


‘성인불유 이조지어천’은 이 책의 주요 주제인 만큼 이와 관련된 글을 여러 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실천하기 어렵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오십이 되기 전까지 십 년이 남았으니 항상 ‘성인불유 이조지어천’을 가슴에 새기며 누군가를 판단하려 할 때마다 스스로 멈추는 연습을 부지런히 해야겠습니다.



4. 명령은 바꾸려 하지 않고, 일은 억지로 이루려 하지 않는다.

무천령 무권성(無遷令 無勸成)


지금 다니는 회사에 17년째 다니고 있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제 그러려니 할 때가 되지 않았어?’라고 오히려 저를 부적응자처럼 바라보는 지인들이 야속하기만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저를 자판기처럼 취급할 때입니다. 자판기! 동전을 넣으면 당연히 상품이 바로 나올 것으로 기대하는 자판기! 그리고 그런 일은 꼭 퇴근 무렵(그것도 금요일 퇴근 무렵!)에 벌어집니다.

"이거 위에서 검토해보라고 하는데 월요일 오전에는 보고 드려야 되니 주말에 보고자료 만들어 놓으세요!"

직원의 개인 시간,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뺏어가는 그들이 무척 무례하게 느껴집니다. 동전처럼 '명령'을 투입하면 '결과 보고서'라는 상품을 당연하 갖다 바쳐야 되는 저는 그야말로 딱 자판기입니다. 화를 억누르면서 주변을 돌아봅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묵묵하게 자판기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동료 직원들이 저처럼 안타까워 보입니다. 재난 상황도 아니고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니고 더욱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아닌, 단지 외부에 '뭔가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액션만이 필요한 일에 저의 소중한 시간을 마음대로 뺏어가는 상사님들이 참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습니다. 금요일 오후! 개학 전 마지막 주말을 아들과 함께 보내려는 기대감으로 행복한 저에게 고환율, 美 인플레감축법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 중소기업 지원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세계 경제 흐름이고 미국 대통령도 해결하지 못하는데, 뭘 하라는 건지, 이틀 안에 안 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인가!’라는 생각으로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워킹맘이라 방학중인 아들과 재밌는 추억을 만들지도 못했는데 방학 숙제 챙겨줄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 회사가 너무 지긋지긋했습니다. 하지만 생업이 달린 직장이니 화를 참으면서 책상 앞에 다시 앉았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각종 무역 통계 자료를 봤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도저히 못하겠다고 말씀드릴까?’라고 고민하던 중 눈에 들어온 <오십에 읽는 장자>! 마음을 달래기 위해 몇 페이지라도 읽으려고 책을 펼쳤습니다.


(왕)의 명령에 대해서는 고치려고도 무엇인가를 권하지도 말 것이니 괜히 나서 봐야 불필요함을 더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명령을 바꾸거나 무엇인가를 권하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하필 본 책의 내용에 깜짝 놀랐습니다. 마치, ‘딴생각 하지 말고 시키는 일 열심히 해!’라고 얘기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덕분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고(그래도 조금은 속상했지만) 무사히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왕조시대가 아닌 지금 제게 왕은 ‘직장 상사’겠지요. 아직 마음수련이 덜 된 탓에 ‘이런 지시사항을 내리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라고 이해하진 못하지만 최소한 상사에게 직접적으로 반감을 표시하진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마음 수련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 실용적인 팁도 제시해주는 <오십에 읽는 장자>! 는 저의 인생책이 될 것 같습니다.



5.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저 그만둘 뿐이다.

불입칙지(不入則止)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대로 있게나. 자네의 마음에 어떤 문을 세우려 하지 말고 어떤 날카로움도 마련하지 말고 마음을 편안히 하면서 부득이한 일이 닥쳐도 있는 그대로 따른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도에 가까워질 것이네."



6. 서 있을 뿐 가르치지 않고 앉아 있을 뿐 의견을 내세우지 않는다.

립불교 좌불의(立不敎 坐不議) : 존경받는 어른이 되고 싶다면 그저 존재하기만 할 것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노인’이 될 수 있지만 존경받는 어른은 지혜와 연륜이 있어야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와 연륜’만큼 중요한 것이 침묵과 기다림입니다. 젊은이들이 충분히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는 시간을 기다려주고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기다려야 됩니다.

신입직원들에게 ‘꼰대’로 보이고 싶지 않아 노력하는 저는 사십 대 초반! 신입들이 늙은 꼰대보다 더 싫어한다는 젊은 꼰대지요. 장자 선생님의 ‘립불교 좌불의’는 아직 노인이 되지 않은 제게 회사에서의 처신을 어떻게 하면 현명할지 알려주는 교훈입니다. 집에서는 아들 둥이에게 회사에서는 후배들에게! 그들이 저를 필요할 때까지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나의 해방일지 15화 中>

(술집에서)

기정 친구 : 야, 우리 사십 금방 오지 않았니? 오십도 금방 오지 않을까?

기정 : 안돼, 오십은 그렇게 빨리 오면 안 돼! (중략) 오십! 오십에도 무슨 감정이라는 게 있을까? 그 나이 되면 그냥 동물 아닐까 싶다. 살아있으니까 사는, 우물우물 여물 먹듯이 먹고 그러는.

옆 테이블에 앉은 50대 여성 : 살아있으니까 산다 싶은, 우물우물 여물 먹는 동물인 오십인 여자가 말해줄게. 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는데 음...... 서른이면 멋질 줄 알았는데 꽝이었고. 마흔 오면 어떻게 살지? 오십은? 살아 뭐하나 죽어야지. 죽어야지, 그랬는데 오십? 똑같아. 오십은 그렇게 갑자기 진짜로 와! 난 열세 살 때 잠깐 낮잠 자고 딱 눈 뜬 것 같아.


열세 살 때 잠깐 낮잠 자고 딱 눈 뜬 것처럼 갑자기, 진짜로 오는 오십! 하지만 <오십에 읽는 장자> 덕분에 저의 오십은 살아있으니까 사는, 여물여물 먹이를 먹기만 하진 것 같진 않습니다.


"그쳐야 할 곳에 그치지 못하고 있다면 몸은 앉아 있어도 마음은 달린다고 하며 이를 좌치(坐馳)라고 부른다네."

저의 오십은 불필요한 생각으로 내면이 가득 차 이유도 없이 시끄럽고 분주한 ‘좌치’의 상태를 벗어나길 바랍니다. 대신에, 사사로운데 얽매이지 않는 맑고 맑은 마음인 ‘막막(漠漠)’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손발 그리고 몸을 잊고 귀와 눈의 작용은 물리쳐서 육체를 떠나고 지식을 버림으로써 큰 도와 하나가 되는 좌망(坐忘)도 이루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작가님의 말씀처럼,

부지(不知)! 즉 '알 수 없음'을 선언한 후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는 연습을 해야 될 테고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관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본질을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하고

때로는 비움을 위해 노력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세월을 흘려보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채우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 사십 년과 달리 마음을 비우고, 정을 나누며, 생각을 정돈하며 십 년을 비우다 보면 제가 있어야 될 곳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오십 대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생깁니다. 저의 십 년 뒤를 기대하며 오늘의 감상을 마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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