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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진 May 13. 2021

할머니, 그냥 지나가 주세요!

오후 6시, 둥이가 다니는 영어학원이 끝나는 시간이다. 


나의 일과는 그보다 한 시간 전인 5시에 끝난다. 원격수업 듣기, 책 읽기, 글쓰기 등... 집에 있는데도 하루 종일 바쁘다. 다시 복직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1분 1초를 허투루 쓸 수 없다. 바쁜 엄마를 이해하는 착한 둥이는 2학년이 되면서부터 등교, 학원 봉고차 타기 등은 이제 혼자 할 수 있다며 엄마의 공부를 지지해 준다. 


다만, 딱 한 가지! 일과 중 마지막인 영어학원 끝날 때만큼은 엄마가 데리러 와 주길 바란다. 아직 둥이에게 엄마를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있는 것 같아서 기쁜 마음으로 5시에 공부를 끝내고 30분 정도 집안 정리를 하고 아들을 데리러 간다. 오늘 계획한 일을 다 끝내고 둥이를 데리러 갈 때면 세상 행복하다. 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둥이와 시간도 보낼 수 있다니... 정말 휴직하길 잘 한 것 같다. 


매일 늦은 오후, 둥이와의 귀갓길은 행복하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홀가분한 기분, 산책하기 딱 좋은 선선한 바람, 조잘거리는 둥이의 이야기... '행복 그 자체다...'라고 느끼던 찰나, 지나가던 할머니가 말씀을 하신다.


 할머니)와~! 너 운동 좀 해야겠구나!

 나) 운동이요?

 할머니) 살 좀 빼야겠다고...


우리 아이가 뚱뚱한 건 나도 안다. 작년 한 해 집에만 있으면서 우리 식구 모두 확 찐자가 됐다

갑자기 기분이 너무 나빴다. 

이 할머니는 도대체 누구길래, 알지도 못 하는 아이에게 상처의 말을 던지는 것일까? 무슨 자격으로 충고랍시고 대놓고 상처를 주는 것일까?


 나) 할머니, 뭐라고 하셨어요?

 할머니) 아니, 애가 배가 많이 나와서... 귀엽다고.

 

  나) 저희 애 보고 귀엽다고 해주신 건 감사한데, 앞으로 그런 건 마음속으로 생각하시고 말씀은 하지 말아 주세요. 좋은 얘기도 아니고 외모에 대한 안 좋은 평가를 모르는 사람에게 들음 어르신은 기분 좋으시겠어요?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황당해하는 어르신을 두고 돌아섰다.


  둥이) 엄마, 내 배가 나와서 화난 거야? 미안해...

  나) 둥이한테 화난 게 아니야.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고 해도 듣기 싫은 말을 할 땐 조심해야 되는 건데, 저 할머니가 그걸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린 것뿐이야. 나이가 많으셔도 모르는 게 있을 수 있는데 알려드림 돼.


AB형이라 그런지 유독 상처 받지 않는 남편은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상대방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국이 짜네, 다음엔 소금을 조금 덜 넣어 봐. / 너 살찐 것 같아./ 그 옷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사무실에서의 일은 네가 말실수한 거야./ 등등... 

냉정한 사실을 듣는 게 아프고 기분 나쁘더라도, 상처에 소금을 뿌려야지 낫는다고 한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누가 나에게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쉽게 주눅 든다. 괜한 눈짓 한 번에, 힘 빠진 숨소리를 통해서도 마음을 다친다. 나의 실수는 내가 제일 잘 안다. 내가 고쳐야 할 점은 내가 잘 아는데... 노력해도 잘 고쳐지지 않아서 속상할 때 누가 충고랍시고 조언을 해 주면 땅 속 끝까지 가라앉아 버린다. 다시 힘을 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지인들에게 부탁한다. 


 나의 잘못이나 모자란 점으로 손해를 본 게 아니라면, 단지 내가 발전하기 바라는 마음이라면,

 내 실수를 알려줄 때 번거롭더라도 돌려서 말해주고 한 템포 쉬었다 말해달라고...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지켜만 봐 달라고...


길에서 마주친 사람의 성향을 아는 것은 어렵다. 다가오고 있는 저 남자가 혹은 저 여자가 외향인인지 내향인인지, 솔직한 충고에 고마워하는지 마음 아파하는지... 모른다. 


그럴 땐, 제발 입을 닫은 채 지나가길 바란다.


다가오는 저 사람이 뚱뚱하고, 공부를 못하고, 성격이 나쁘더라도 1초면 지나치는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공부를 못 한다고 해서 학원을 보내야 되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아프다고 해서 병원비를 내줘야 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행인이다.


젊은 사람들은 바쁘게 산다고 바빠서 남에게 관심을 둘 여유가 없다. 주로 한마디를 던지는 건, 나이 든 노인이다. 


나이가 많은 건 남의 상처를 건드리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면죄부가 아니다. 


힘들게 오랫동안 살아온 연륜을 통해 타인의 상처를 잘 보듬어주고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손 잡아주며 '괜찮다' 한마디로 안심시켜 줄 수 있는 진정한 어르신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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