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난 고 3 때 교대를 가려고 준비했었다. 하지만 보기 좋게 수능을 망쳤고 시험을 망치고나니 내가 원하는 대학을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갑자기 나의 꿈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내 인생에 '재수'는 없었기에 '원치 않는 대학에 가느니 그냥 대학을 안 가고 만다.'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 계신 친척을 만나고 온 아빠가 나를 불렀다.
승희야, 이번에 미국 삼촌네 가보니 기공소랑 치과를 하고 있는데 엄청 크고 대단하더라고! 너도 치기공사를 해보는 건 어때? 졸업하고 삼촌네 가서 일하면 되니까 취업도 걱정 없고.
그래서 당시 하고 싶었던 게 없어진 나였기에 아빠 말따라 치기공과에 지원하게 되었다. 치기공과를 검색해보니 꽤 많은 대학이 나왔는데 그중 제일 상단에 검색돼서 나온 대학교로 지원을 하였다. 그렇게 나는 치기공과 학생이 되었다.
#2
3년 동안 나는 학교에서 치아모형을 보고 만들고 깎고 모양을 만들고 이런 고도의 손재주가 필요한 모든 것들을 했다. 다른 친구들은 치아 모양을 보고 똑같이 모형에 정교하게 잘 만들던데 난 치아를 아무리 쳐다봐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모든 게 어려웠고 하기 싫었기 때문에 수업이 즐겁지가 않았다.
그 이후로 대부분의 수업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대학생활을 의미 없이 보냈다. 이게 나의 대학생활이었다. 생각 없이 살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도 없었고 다른 대학생들처럼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나에게 꼭 필요했던) 무미건조했던 시간들이었다.
#3
그러던 어느 날 우리 학과 출신인 병원 실장님이 우리 학교로 강연을 하러 오셨었다. 당시 병원에서 직원 교육 및 병원 마케팅을 하며 억대 연봉을 받고 있는 실장님이었다. 그분의 강연은 정말 재밌었다.
치기공과를 나와도 치기공 말고 다른 일을 하며 저렇게 멋질 수 있구나...!
그때 내가 하고 싶은 게 몇 년 만에 생기는 가슴 두근거리는 순간이었다. 몇 주동안 그 강연을 들으며 나도 병원마케팅이라는 것을 하고 싶어 졌었다. 그때의 떨림은 '마케팅' 때문도 있었지만 또 하나는 '치기공 이외에 다른 멋진 일' 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주변 대학생 친구들이 가끔 묻는다.
마케터를 하려면 경영학과를 가야 하나요?
나는 솔직히 어떠한 불안함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안다. 나도 내가 배달의민족에 와서 마케팅을 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속해있는 아주 작은 세계만 보고 살지도 모른다.
경영학과를 가면 마케터가 될 가능성은 높지만 마케터를 하기 위해 경영학과를 갈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우리 마케팅실만 해도 치기공과 출신인 나를 비롯하여 패션학과, 국문학과, 광고학과 등 다양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양한 경험과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더 많은 퍼포먼스를 내는 것 같다.
일을 하다 보니 어떤 전공 출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에 관심을 쏟고 애정을 갖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부한 말일 수도 있지만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현재 상황을 절망할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꾸준한 관심'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태도' 그 두가지를 잊지 않고 실천해나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다 보면 기회는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