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에는 중력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문장 중에, '말 없는 자는 상대를 수다쟁이로 만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 말을 많이 하면, 내 말이 끼어들 틈이 없죠. 상대가 과묵하면(하지만 당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신호를 주면) 나도 모르게 그 틈을 메우려 들게 됩니다. 이것은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콘텐츠든 수신자로 하여금 들어올 여지를 주면, 나도 모르게 개입하고 싶어 지고, 일단 개입이 시작되면, 그것에 대한 관심도 달라집니다. 어떤 영화가, 노래가, 소설이, '저건 내 얘기야'가 되니까요.
- 생각의 기쁨, 유병욱
'생각의 기쁨'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단이었다.
빈틈의 중력.
한 때는 그 빈틈을 메우려 무던히 노력한 적이 있다.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답을 정해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던 적도, 때론 어색한 게 싫어서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마구 했던 적도, 또는 어떤 캠페인을 기획할 때 내가 원하는 대로 답을 정해놓았던 적도 있었다.
어렸을 때 드라마에서 '열린 결말'을 쓰는 작가들을 제일 싫어하기도 했었다. (특히 '파리의 연인'과 '거침없이 하이킥'...)
그러나 요즘은 왜 이렇게 열린 결말이 좋은 건지.
1화부터 작가와 극 중 배우들과 호흡하며 시청자가 함께 완성해나가는 드라마나 영화가 왜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인지.
'빈틈'의 힘을 믿게 되어서부터였을까?
서점에 가면 꽤 오랜 시간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있는 책이 있었다. 나에게 큰 흥미가 있는 책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왜 이렇게 이 책에 열광할까 궁금해서 읽어보았다. 그 자리에서 다 읽어볼 정도로 분명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책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조금 부담스럽게 다가왔었다. 책 속의 글들이 너무 나에게 친절했고 구체적으로 말을 건넸다. 조금의 빈틈을 주지 않았던 책이었다.
나는 조금 더 내가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글, 여운을 주는 '밀도 있는 글'을 아주 좋아한다. 짧은 문장이지만 그 짧은 문장에 강한 힘이 들어있는 그런 밀도 높은 글들. 이런 글을 쓰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그런 글을 쓰는 수많은 작가들을 존경한다.
마케팅을 기획할 때도 빈틈은 필요했다.
맨 처음 배달이 이모티콘 기획할 때였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감정들을 우선순위별로 정리하는 일, 그리고 그 확정된 표현들을 디자이너들에게 기획하여 전달하는 것이었다.
[확정된 메시지 표현]
1) 안녕
2) OK 최고
3) NO 거절
4) 신남
5) 사랑
6) 축하
7) 의욕
8) 배고파
9) 치킨
10) 미안
11) 힘듦, 쭈글쭈글, 우울
12) 펑펑 움, 훌쩍
13)!!!!!!
14)???????
15) 무서워 (떨림), ㄷ ㄷ ㄷ
16) 화남
17) 졸려, 잘게, 굿 나잇
그렇지만 이사님, 디자이너들과 이야기하면서 이모티콘 기획에서도 빈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1. 이모티콘은 애매해야 한다.
2. 애매모호해야 상대방이 감정 이입하며 쓸 수 있다.
3. 상대방 카톡 대화창(즉, 보이는 입장)에서 생각하고 만들어보자.
4. 캐릭터는 약점이 있어야 사람들이 사랑한다. 그 약점에서 사람들은 캐릭터에 자신의 약점을 투영해서 공감한다.
위의 배달이 이모티콘 중 명확한 감정 표현도 있긴 했지만 애매한 것들도 분명 존재하게 했다. 어떤 표현을 보고 누군가는 '울고 있네, 무표정이네.'라고 볼 수 있고 누군가는 '웃고 있는 것 같은데?'라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것.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확정된 표현을 정해버리는 것은 쓰는 사람 입장에서 재미없어지므로.
나는 일상에서 꽤(?) 스스로에게 완벽함을 요구하고 있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는 빈틈을 메우려 노력하지 않으려 한다. 특히 누군가와의 대화에서는 공백을 두려고 한다. 예전엔 그 빈틈이 어색하곤 했는데 요즘엔 그 공백에서 상대방의 매력을 발견하곤 하니까 말이다.
때론 빈틈을 조금 열어 보이고, 그 빈틈을 상대가 채우게끔 해보세요.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만들어보세요. 완벽한 메시지를 발신하겠다는 생각을 살짝 내려놓아보세요. 빈틈에는 중력이 있고, 매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많은 순간들이 사실은, 완벽해 보이던 누군가가 빈틈을 보일 때 아니었던가요?
-생각의 기쁨, 유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