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육개장 사발면을 먹지 않는 이유
날 키운 오할은 컵라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참 많이도 먹었다. 돈이 없을 때, 기숙사에서 배가 고플 때, 먹는 시간이 아까울 때, 그냥 밥 먹는 게 귀찮을 때, 제일 만만한 게 컵라면이었다. 종류도 좀 많은가. 속이 좀 니글거리는 날은 꼬꼬면, 고급진 게 먹고 싶을 때는 오징어 짬뽕, 진한 국물이 땡길 때는 사리곰탕, 속 편한 게 먹고 싶을 때는 튀김우동을 골라먹는다. 게다가 같은 상표라도 큰 사발과 작은 사발은 맛이 다르다. 보통 스프는 같아도 면이 다를 때가 많은데, 맛 차이가 큰 튀김우동 같은 경우는 가끔 작은 컵을 두 개 사서 먹기도 한다. 나름 컵라면 미식가인 셈.
그런 내가 웬만하면 안 먹는 라면이 하나 있다. 바로 육개장이다. 무난한 맛으로 꽤나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만 정작 컵라면 마니아인 나는 육개장에 손을 잘 대지 않는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던가, 아버지의 외도로 우리 집이 파탄이 나고 있을 적 이야기다. 어머니가 나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고, 나는 매일 우리 집 생존비를 더하고 빼며 어찌 해도 적자인 가계부를 흑자로 바꾸려 애를 쓰던 시기였다. 그러면서도 집 안이 지옥 같아서 매일 새벽같이 도서관을 갔다가 폐관 노래가 흘러나올 때 발을 질질 끌면서 돌아오고는 했다. 그러다 보면 삼시 세끼를 밖에서 해결해야 했다. 천 원 이하의 돈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건 컵라면 밖에 없었고, 나는 두 달간 컵라면으로 연명했다.
매일 편의점에 들어서면 수십 개의 컵라면이 각양각색의 얼굴을 내비치고 앉아 있었다. 당시 사리곰탕은 1000원, 육개장은 850원, 그리고 오징어 짬뽕은 1300원이었다. 그 앞에 서서 난 매일 한참을 고민했다. 5분여를 그 앞에서 서성이면서 고민하다가, 매일 육개장을 집었다. 한 달 반이 지났을 때는 육개장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났고, 그 면을 입 속에 밀어 넣으면 토기가 치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육개장을 집어 들 수밖에 없는 것이 비참해서 꼭 오징어 짬뽕을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벼랑에 몰렸다는 건 더 이상 효율을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다. 1000원짜리가 850원짜리의 2배의 효용을 준다고 해서, 1000원짜리를 먹을 수는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인지, 과연 이 선택이 150원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육개장을 먹었고, 사리곰탕을 먹지 않았다.
라면은 나한테 참 고마운 음식이다. 천 원짜리 한 장으로 따뜻한 국물을 먹을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고, 내 많은 날들을 따뜻하게 데워준 음식이다. 지금도 하루에 하나씩은 꼬박꼬박 먹는다. 그러나 음식은 시절을 저장하고, 나에게는 별로 꺼내보고 싶지 않은 시절들이 있다. 육개장은 나에게 그런 시절이다. 언젠가 육개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그게 지금이 아닐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