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빗방울 Aug 27. 2022

01 달의 시간

번역가의 시간

어느 나라를 여행하건 손바닥 만 한 예쁜 노트를 한 권씩 사곤 한다. 그렇게 사 모은 이국적인 색감의 노트가 꽤 여러 권이다. 노트에는 언젠가 긴 글로 써보고 싶은 생각의 단초들이 적혀 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써볼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고.      


노트 자체가 아담한 크기여서 생각을 길게 풀어 갈 수 없는 게 좋았다. 예쁜 노트에 낙서가 쌓여갔지만 그 ‘언젠가’가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씨앗 상태로 너무 오래 방치하다가 꽃도 잎도 피우지 못하고 말라버리는 건 아닌지 수시로 두렵긴 했어도.      



내 삶을 지배하는 단어들 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마도 두려움 Fear일 것이다. 나는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이나 글에 무작정 끌린다. 내가 처음 출판사에 기획을 제안해서 번역 출간한 책이 <비행공포 Fear of Flying> 였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쩌면 내 삶의 중요한 결정들도 어쩌면 두려움의 작용이었을지도. 어쩌면 번역가를 직업으로 선택한 것도 나의 영혼을 바닥까지 드러내야 하는 창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도.      


어느 유명한 작가가 창작의 고통을 토로하며 이런 글을 썼다. 번역하는 사람들은 백지를 대면하는 순간의 공포를 느낄 일이 없으니 좋겠다고. 자신의 영혼을 쥐어짜는 고통 없이, 매일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서 좋겠다고. 번역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나를 화나게 하는 모든 말들이 그렇듯이 그 말에도 분명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을 것이다. 


여기 이 글들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번역문이 아니다. 이 글에는 영미권 어느 유명 작가의 영혼이 담겨 있지 않다. 이 글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의 옮긴이가 된다. 설레고 또 두려운 일이다. 


작가가 별이라면 번역가는 달이다. 작가는 별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며 별의 순간들을 누리지만, 번역가는 달처럼 은은하고 잔잔한 기쁨에 젖는다. 지난 28년은 나에게 달의 순간들이었다.  별이 되어보고 싶은 달의 분투였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나는 그 시간을 너무도 사랑했다. 이 글은 그 시간의 기록이자 그 사랑의 결과다. 


바로 오늘이야, 라는 생각은 영원히 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용기를 내어본다. 번역문보다 덜 매끄러운 글을 써볼 용기, 위대한 메시지가 담겨 있지 않은 소소한 일상의 글을 써볼 용기,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글을 써볼 용기, 원문의 원심력에서 벗어나 무중력 상태에서 중심을 잡고 글을 써볼 용기.


나에겐 여전히 너무 위험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이제 나는 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라는 것을. 

<비행공포>를 쓴 에리카 종이 말했듯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일이다.  


이제 그 첫발을 뗀다. 그 두려움을 이겨본다.      

달빛이 나를 비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