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국에 오다니 (4)
나는 뉴욕이라는 도시, 화려하고 멋지고 유명한 이 땅, 기대감과 설렘으로 가득 찬 마음을 이끌고 왔다. 이곳은 나에게 왠지 모르는 또다른 미국, 새로운 세상 같았다. 나는 내 마음속에 있는 꿈과 환상을 송두리째 젊음이라는 빅뱅의 소용돌이 속에 모든 것을 다 걸고 살아가면 언젠가는 나도 멋진사람이 될 것같은 희망을 꿈꾸기 시작했다. 힘이 되었던 것은 함께 코네티컷에서 온 나이 룸메이트였다. 나와 내 룸메이트가 정착한 곳은 교회에서 가까운 우드사이드(Woodside)라는 퀸즈(Queens)에 있는 동네였다. 아파트는 한 10-15년 전에 지어졌었던 것 같았고 삐그덕 소리가 좀 많이 나는 꽤나 넓은 거실과 방하나가 있었다.
우리는 그냥 침대매트리스 하나에 책상을 각자 사고 물건이 없는 데로 살아갔다. 음식 하는 것이 사 먹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어 혼자 대형중국마트에 가서 필요한 재료들을 사 음식을 곧 잘하곤 했었다. 내 음식은 다 '내 맘대로' 퓨전음식이었다. 중국마트에는 한국재료부터 시작해 태국, 일본, 베트남 식재료들이 많았다. 가성비도 좋고 구경하기도 신기해서 자주 가서 시간을 때웠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나의 룸메이트는 음식에는 소질이 없지만 설거지는 잘할 수 있다고 항상 설거지를 도맡았고 재료 손질을 도와줬다.
가끔씩 목사님과 사모님이 오시면 두 손에 잔뜩 고기과 반찬들을 들고 오셔서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일주일은 넉넉히 먹고 또 고기파티로 저녁을 장식해기도 하였다. 나는 어학원을 다니며 학교를 탐색하고 있었다. 나의 탐색기간은 꽤 길었는데 왜냐하면 나는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 나 자신이 잘 몰랐고 어떤 것 하는 것이 나에게 맞을지도 몰랐다. 처음엔 재즈피아노 공부를 해볼까 해서 뉴욕에 유명한 재즈피아니스트에게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다. 근데 내가 재즈를 잘 몰라서 그런지 아니면 재즈 선생님의 취향이 너무 나랑 다른지 적응이 안 되었다. 그분의 스튜디오가 몇 개 있는데 뉴욕대학교에서 받았던 재즈피아노는 그나마 장소가 안전하게 느껴졌는데 브루클린 스튜디오는 가는 길도 너무 멀었고 거리도 음산했으며 완전 폭력영화에 나오는 위험한 동네 같아 보였다. 거처는 공장 같은 큰 건물에 몇몇 남자들과 함께하는 곳이었는데 난 너무 무서웠고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던 경험이 있다.
가장 중요한 레슨 부분에서 만족을 하지 못하였다. 그분은 음반도 몇 개나 내시고 뉴욕대 교수이시고 음악연주나 스타일은 거의 수준급인데 가르치는 재능은 없었다. 흔히 말하는 책이나 노트도 없었고 몇 명의 재즈 피아노연주자 이름을 주며 그 사람의 연주들을 들어보라고 하였다. 그냥 나에게 필(feel:느끼다)이 가는 대로 치기를 요구했는데, 나는 마음속으로 "지금 필이 전혀 안 생겨요" 하며 그냥 대는 되로 얼렁뚱땅 치며 속으로 필을 불러 외쳤다. 불러도 안 오는 필에 식은땀은 뻘뻘 흐르고 빨리 레슨이 끝나기를 염원하는 필로 치고 있으면 레슨이 끝나버린다. 결국은 한 세 번 레슨 받고 "다음에 또 봐요"라며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
다른 일로도 내 삶은 바빴다. 교회음악작업이 많았다. 나를 교회에 소개해 주신 분이 재즈피아니스트이셨고 키보드를 치시며 찬양을 인도하는 전문찬양 재즈피아니스트이시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목사님은 무작정 나를 쌤에쉬(Sam Ash)라는 악기점에 데리고 가서 몇 천불 하는 키보드를 두 개나 사셨다. 나도 한국에서 대형교회 반주자여서 두 개로 키보드를 쳤기에 키보드 두 개 치는 것은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목사님의 거침없는 추진력과 행동력에 나는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목사님은 젊은 시절에 악기를 연주하시는 베이시스트(Bassist:베이스 기타 치는 음악인) 이셨다고 한다. 재즈와 팝 등을 하시는 밴드에서 미국의 유명한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연주하시는 분이셨다. 그래서 교회음악 투자에 더욱더 대범하셨던 것 같다.
교회에서 20명 정도의 찬양팀이 있었다. 주로 토요일 저녁에 3시간에서 4시간 연습을 하였고 세션들도 음반의 음악을 그대로 다 따라 쳤고 찬양팀의 화음도 파트별로 연습하고 나면 정말 온몸에 진이 다 빠져나갔다. 그리고 나는 새벽기도부터 수요예배 금요예배 청년부 예배 다른 행사예배들까지 모든 음악을 맡아서 했었다. 그러면서 교회에 아이들의 피아노선생님이 되어 레슨양도 많아지기 시작했고 부모님에게 생활비를 안 받을 만큼 재정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이었는지 그냥 희미해져 갔고 교회가 마치 직장이 되어 버렸고 삶의 중심이 되어 버렸다. 나는 여기 뉴욕에 왜 있는 걸까?라는 물음을 던질 즈음에 사랑하는 사람이 눈에 나타났고 이 사랑은 영원히 변함없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시기가 왔다.
To be continued...(5화를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