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는 이동진 평론가가 뽑은 2024년 최고의 책이기도 하고, 여러 독자들에게서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나는 (우리나라에서는) 2012년에 출간된 줄리언 반스의 전작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재미있게 읽었었고, 그렇기 때문에 큰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줄리언 반스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2011년에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
작가는 1946년에 태어났고, 영국 출생이다.
즉, 65세에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집필했고, 76세에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를 집필했다.
(나도 나이가 들면서 경험하고 알게 된 사고의 깊이가 글로 표현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작가가 책의 제목을 약간은 선문답스럽기도 한 문장형식으로 짓는 것을 좋아하는가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제목을 붙인 것일 뿐,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원제목은 'The sense of an ending'이고,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의 원제목은 'Elizabeth Finch' 인 것을 이번에 찾아보고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판에서는 왜 제목을 그렇게 바꾼걸까.
(이 점에 대해서는 후반부에 한번 더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1. 책을 읽고난 전반적인 느낌
일단 이 책은 읽으면서 나에게는 좀 어려웠다.
신화나 역사, 철학에 관한 이야기들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그 방면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었던 나로서는 책의 페이지는 넘어가지만 내가 제대로 작가의 문장들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확실할 수 없었다.
확실히 사건들의 전개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내용 자체가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저자가 독자들이 그틈에서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사유하기를 저자가 바라며 쓴 글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단순히 읽으면서 일차원적으로 즐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끔 만드는 글을 쓴 저자가 역시 대가라고 생각한 부분) 아주 길지 않은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은 복잡했다. 두뇌가 불가항력적으로 풀가동되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그래서 저자가 말하려고 한 바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며 다시 책의 첫장으로 돌아가게 되는, 그런 책.
이 책을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분명 소설이지만, 나에게는 소설의 형식을 취한 철학 서적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파울로 쿄엘로의 책들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2. 책의 전반적인 내용
책은 크게 3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1)
책의 첫 장에서는 화자인 '닐'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엘리자베스 핀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엘리자베스 핀치(이하 EF)는 대학에서 문화사를 가르치는 강사로 지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묘사된다. 그녀는 단순한 지식 전달자가 아니라, 학생들에게 비판적 사고와 독립적인 사유를 요구하고 끌어내는 선생이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닐은 그녀를 '스토아 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스토아철학'은 이성적인 삶과 자연과 조화를 중시하는 윤리적, 철학적 학파이다. 이들은 외부 사건이 아닌 자신의 내적 반응에 초점을 맞추고, 운명에 대한 수용과 자제를 통해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EF는 타인과의 관계에 정서적으로 거리를 두고, 개인적인 삶에 대한 정보를 나누지 않는 미스터리한 인물로 그려진다.
자기 연민이 없었던 그녀는 실망, 외로움, 배신, 공적 망신주기를 경험하고서도 차분하고 무관심하게 마주한다. 그녀의 그러한 스토아학파적인 성격을 여실히 나타냈다고 (내가) 생각하는 부분을 옮겨보자면,
p42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
우리의 의견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우리의 충동, 욕망, 혐오-간단히 말해서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모든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고, 우리의 소유나 평판이나 공적 직책도 마찬가지다. 즉,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는 모든 것이 그렇다.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들을 하면 그 성격상 자유롭고 방해가 없고 막힘이 없다.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을 하면 약해지고 속박되고 방해받는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억하라. 본성상 속박하는 것이 자유를 준다거나 네 것이 아닌 것이 네 것이라고 생각하면 좌절하고 비참해지고 화가 날 것이며 신과 사람을 탓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네 것만 네 것이라 생각하고 네 것이 아닌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네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도 너에게 강요하지 않고 아무도 너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고, 너는 아무도 탓하지 않고 아무도 비난하지 않고 내키지 않는 일을 단 하나도 하지 않을 것이며, 너는 적이 없고 아무도 너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해치려 해도 너는 전혀 해를 입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p104
나는 종교 또는 민족 집단들의 '추방과 박해'이전에는 사회적 조화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없었던게 분명하다. '추방'의 목표 자체가 국가를 더 평화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을 없애라, 설사 그들에게 '문제'를 떠안기는 게 우리라 해도. 국가를 단일 인종으로 또 일신론으로 만들어라, 그러면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고인 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물론 이런 계획은 뜻대로 성사된 적이 없는데 이유는 두가지다. 하나, 적대는 계속되었고, 그 결과 우리 자신의 경계 내에 있는 '타자'를 박해하는 대신 '타자'의 내부에 있는 '타자'를 박해하러 밖으로 나갔다. 둘, 사람들 사이의 다양성을 줄인다고 해서 내부의 조화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작은 차이의 나르시시즘이 그렇게 놓아두지 않았다.
닐은 남들의 의견에 휘둘리지않고, 세상과 역사를 객관적으로 직시하는 EF에게 인간적인 존경? 경외감?을 느꼈고, 수업이 끝난 이후에도 한달에 한번씩 그녀와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고, 고대했다. (EF에 대한 닐의 감정은 이성적인 것보다는 인간적인 존경심이었다고 생각함)
- EF의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의 예
1_우르술라와 만천명의 동정녀의 순교를 '경찰관을 이용한 자살'로 표현
2_배우가 하는 연기를 '진정성을 생산하는 인위성의 완벽한 예'로 표현
3_'적당한 행복에 적당히 만족하라. 인생에서 유일하게 분명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건 불행이다'(괴테)
4_왜 우리는 집단적 기억-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개인적 기억보다 틀릴 가능성이 적을 거라고 기대하는 걸까
5_ 역사는 길게 보아야한다. '실패는 성공보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깨끗한 패배자보다 지고 나서 뒤끝이 있는 사람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주장하고 싶네요. 나아가서 배교자가 늘 진실한 신자보다, 거룩한 순교자보다 흥미롭습니다. 배교자는 의심의 대변자이고, 의심은 활동적인 지성의 표시죠.'
6_p100 '암은 도덕적으로 중립이야'
7_공격의 한 형태로서의 연민. 연민을 주의하라. 정말로.
8_내가 외로운 여자라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나는 혼자이고,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혼자인 것은 강점이고 외로운 것은 약점이다. 그리고 외로움에 대한 치료책은 혼자가 되는 것이다.
닐은 EF의 사망소식을 듣고 EF가 자신에게 남긴 메모와 노트를 가지고 오면서 EF에 대해 회고하고, 그녀의 수업에서 미처 완성하지 못한 에세이를 (아마도 그녀의 자서전을 집필한다는 느낌으로) 쓰려고 결심하게 된다. 에세이는 수업에서 다뤘던 역사적 인물 율리아누스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그 작업을 통해 EF를 이해하고, 회고하고자 했을거라 생각한다.
2)
책의 두번째 장에는 닐이 EF의 수업에서 완성해야 했던 '율리아누스'에 대한 에세이가 소개된다.
율리아누스는 4세기 로마의 황제로,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받아들인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기독교를 배척하고 전통적인 로마 다신교를 부활시키려 했던 인물이다. 기독교를 거부하고 다신교적 관점에서 로마 제국의 정체성을 회복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그래서 기독교 중심의 서구에서 후세에 '배교자' 율리아누스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시도는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시대별로, 그리고 연구자에 따라서 율리아누스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달라진다.
(닐은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p133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굴의 영웅'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탄의 동생이나 다름없다고.
p142 문: 사디스트의 정의는? 답: 마조히스트에게 상냥한 사람)
당시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우상숭배자이자, 동물을 죽여 희생제를 치르고, 점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배교자로 생각되고 힐난받았지만, 후세에 다른 이들에 의해서는 '온화함'과 '관용'을 갖춘 철학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리고 EF처럼 당시 기독교가 타종교와 사상을 배척하고 관련 기록물과 문화를 폐기했기 때문에 어쩌면 더 발전했을지 모르는 역사에 걸림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p199 만일 근대 세계가 십자가의 그림자 속에서 산 게 아니라 다정한 여신의 망토 안에서 살았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것은 커다란 문제다. 안타깝게도 이 문제에는 답을 찾을 수가 없다.
p201 인류에 대한 가장 큰 타격은 기독교의 도래였다... 고대 세계에서 인간과 신의 관계는 본능적 존중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것은 관용이라는 관념으로 계몽된 세계였다. 기독교는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적을 멸절한 최초의 신조였다. 그 기조는 불관용이다.
3)
책의 세번째 장은 다시 현재로 돌아와 닐이 율리아누스에 대한 에세이를 쓰면서 새삼 발견하고 느끼게 된 EF의 '삶에 대한 철학'을 곱씹는 부분이다.
1장과 수미쌍관을 이룬다고 생각될 정도로 1장에 나왔던 문장들과 당시의 상황들이 다시 등장하는데 그것들은(즉 EF의 철학들은) 2장의 율리아누스에 대한 이야기를 거치며 대입되고 재해석되어 풀이된다.
결국 2장의 율리아누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은(사실 역사적 '사실'이라고 전해지는 그것도 정말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각과 가공하는 말에 따라 (그가 의도를 가지고 그랬든, 아니면 정말 잘못 알아서 그랬든) 얼마든지 그 '사실'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p206
사람들이 내가 한 일과 한 말로 내가 누구였는지 알아내려 하지 못하게 하라
p219
어딘가에서 로마의 추도 연설에서는 죽은 귀족을 찬양하고 되살릴 때는 일련의 수사와 관습에 의존한다는 것을 읽은 기억이 났다. 그는 이런 식으로, 딱 이런 식으로 지혜로웠고, 이런 식으로 용감했고, 이런 식으로 고결했다. 그래서 떠난 자의 얽고 종기가 난 얼굴에 부드러운 반죽을 발라, 이상화하고 불멸로 만들기에 더 나은 상태로 만들었다
p252
첫째, 신학자들은 훌륭한 소설가도 될 수 있다. 둘째로, 종교로 존재하려면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야한다.
p287~288
나는 율리아누스를 생각했다. 수백 년의 세월이 그를 해석하고 또 재해석해 온 방식. (중략) 이게 어떤 사람의 인생을 보든 벌어지는 일인 것으로 보인다. 그 사람의 부모, 친구, 연인, 적, 자식이 각각 보는 방식. 지나가던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그의 진실을 눈치채기도 하고, 오랜 친구가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고. 사실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오리를 본다. 뭐, 사람으로 살려면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야한다.
그리고 EF는 (일련의 '망신주기' 사건을 겪은 이후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p233
"사람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는 쪽을 택해요"
p244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삶은 그것을 믿는 사람을 속였고, 그것을 구하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었으며, 그것을 신뢰하는 사람을 조롱했다. 삶은 아무에게도 확신을 주지 못하고, 모두에게 거짓으로 드러난다."
닐은 EF는 자신에게 '조언하는 벼락'이었다고 표현한다.
4)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기독교 헤게모니'를 주요 소재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는 이것이 기독교를 비난하려 한다거나 종교적인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재를 통해 인생과 더 나아가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한다고 봤다.
3. 이 책에서 줄리언 반스가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바는 무엇일까.
1) 먼저,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해석되고, 각 시대에 따라 재구성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것
2) 우리는 어떤 태도로 역사를, 혹은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즉, 개인이 역사와 진실을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3) 삶을 살아가고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의견 제시
4. 왜 한국어판에서는 제목을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로 했을까
EF가 견지했던 '스토아적'인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성적, 논리적 사고를 지향했던 스토아철학자들은, 외부 환경이나 사건에 대한 무심함을 강조하며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삶을 주장했다. 운명을 중시여기고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며 수용하고, 삶의 불확실성을 차분하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EF는 자신이 준비한 메모와 노트를 닐에게 물려주었다. 수업을 들을 때 과제도 제출하지 않았던 닐에게.
'우연'으로 생각되는 일들도 이미 정해져 있고 벌어질 일이었기에, 닐이 그 메모와 노트를 가지고 프로젝트를 완성할까 하는 것을 운에 맡겼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스토아적 견지에서 일어날 일은 일어나기에. 즉, 우연은 비켜가지 않기에.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 것이므로,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좌절하거나 비참해 하지 말라는. 결국 그것이 이 책 제목의 의미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