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나누는 디자인적인 삶을 지향하며>
진짜 부자란 재능을 돈을 받고 팔지 않는 삶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재능으로 돈 벌이를 하지 않아도 재능을 그 자체로 즐겨도 충분히 넉넉한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이겠죠.
그러나 재능을 경제활동으로 직결하지 않고 세상에 베풀면서 마음부자가 되는 방법도 있습니다. 바로 재능 기부예요. 예전에 K동물협회에 디자인 재능기부를 했어요.
그 중에 관광지에서 꽃마차를 끌며 학대당하다 구조된 말 '베컴'이 생각이 납니다. 직접 달려가서 구조할 수도 수천수억을 들여 말 보호소를 만들수도 없었지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디자인을 기부하여 학대 당한 말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디자인을 하기 위해 찾아본 자료는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슬픈 내용이 많았고, 전국의 수많은 베컴 같은 말이 아직도 학대당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어요.
그런 취지로 꽃마차의 실태를 알리고 관광지에서 학대 당하는 동물의 서비스를 이용하지 말자는 캠페인 디자인이었죠. 그리고 구조된 베컴에게 대부, 대모가 되어주는 결연 홍보였습니다. 나중에 베컴이 대부, 대모에게 선물받은 사과와 당근을 먹는 사진을 보고 참으로 흐뭇했어요. 작게나마 한 생명을 도울 수 있었다는 것이 디자인을 통해 이 일을 사람들에게 알릴수 있었다는 것이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제가 하는 일이 늘 저렇게 뜻 깊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은 재능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디자이너에게 재능으로 돈을 벌지말라는 것 보다 이 편이 더 자연스러운건 사실이예요.
정말 좋아하는 것은 직업으로 삶지 말라는 말이 있어요. 좋아하는 일이 생계가 되어 일상으로 가지고 온다면 하고 싶지 않은 것도 해야할 때가 많으니까요. 상황에 타협해야하는 세속적인 순간을 직면해야 하니까요.
그러고 보면 저는 제 재능을 적극 활용하여 이걸 직업으로도 삼아버렸네요.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적당히 즐기지 못하고 끝장을 보고 다 가져야 하는 통에 순수한 즐김을 잃은채 애증으로 바득바득 이를 갈면서 소유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에게도 이 길을 선택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거예요. 어릴때 매일 마음가는대로 그림을 그려 방 벽에 붙여 놓으면 엄마 친구들이 그림을 보러 집에 왔어요. 그림에 꽃도 달아놓고 가시고 간식도 놓고 가셨어요. 그때는 정말 재밌게 그림을 그렸어요.
사람들이 그림을 취미로 그리듯이 저도 취미로 그림을 선택할 수 있었겠지만, 괴로운 입시 시절을 지나고 나니 그림은 꼴도 보기 싫어지더라구요. 마찬가지로 디자인을 하는 이 시기가 끝나고 은퇴를 하고 나면 나는 디자인을 더 이상 안하게 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디자인을 하는 직장생활은 평탄치가 못했거든요.
디자인과 함께했던 직장생활 동안 괴로운 시간들이 많았어요. 텃세와 괴롭힘 당하던 시절, 모욕적인 시절, 내가 한 없이 작아지던 시절, 디자인이 싫은 것이 아니라 직장 생활의 어려움이었어요. 그림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지독한 입시생활이 싫어서 그림이 싫어진 것일거예요.
다시 취미로 삼을 수 있는 일이 되려면 한 예순살은 넘어야 할 것 같기는 해요.
그래도 비교적 잘 하는 일이 직업이 되었기에 미우나고우나 경력적으로는 많은 것을 만들어 왔어요. 이 생각은 모든 디자이너들이 같은 마음일거예요. 다른 직업군에 비해 내가 만들어온 작업과 역사들이 실제 제품으로 남아있기 때문이에요. 실제품이 출시가 되면 하나하나 소중하고 뿌듯합니다.
힘들어서 다 그만두고 싶을때도 있었고 지금도 하루하루 언제 그만둘까, 혹은 그만 두지말까 이런 복잡한 사춘기 소녀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디자이너가 된 건 참 잘한 선택인것 같아요. 그 어떤 다른 일을 선택했다고 해도 지금처럼 미움 가운데서 이렇게 오래 사랑이 지속되지는 못할것 같아요.
일이 너무 괴로운데 디자인을 하는 과정은 가끔씩 너무 만족스럽고 뿌듯한 순간도 있거든요. 가끔이어서 문제지만, 다 포기하고 싶을때 넘어지기 직전 아주 가끔 꿀 같은 보람이 찾아옵니다.
참으로 마약같은 직업입니다. 밉고 미워서 '나 올해는 때려친다.' 라고 해놓고 대체 몇년째 하고 있는지...
이러다가 정년까지 갈판이네요. 미움과 사랑은 종이 한장 차이라고 하더니 좋아서 선택해 놓고 현실 속의 디자인에게 지긋지긋하다고 구박해온 세월이 미안하기는 합니다.
지금은 하루하루 살아내느라 재능을 돈으로 바꾸고 있지만, 정말 이 일을 오래 사랑하려면 재능을 돈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데 쓰면 좋겠어요. 제가 정말 사랑하는 동물 친구들, 환경 이슈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어요. 기회가 된다면 좋은 곳에, 좋은 일로 이 힘을 나누고 싶다 생각해요.
역시 디자인을 하기 참 잘한 것 같아요.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사람은 못되지만 디자인이라는 작은 힘을 보태고 싶어요. 디자인으로 사람들에게 음지의 소외된 이야기를 알려줄 수 있어서 다행이예요. 나만 잘 살기 위해서 쓰는 재능이 아니라서 고생해서 배워 놓은 보람이 있네요.
뒷이야기 1 >>>>>
늙은 말, 은퇴한 경주마 등 더 이상 가치가 없어진 말은 관광지로 팔려갑니다. 일부 관광지 꽃마차는 전동모터를 이용해 말은 방향만 조절하지 육체적인 힘이 들지 않는다고 반박하기도 합니다.(대부분은 동력없이 말의 힘으로 끄는 마차도 많습니다.) 동력이 있든 없든 상황은 아주 열악합니다. 아스팔트에서 말굽이 닳아도 교체해주지 않아 거의 맨발이 바닥에 쓸려 피가나는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하루 12시간 이상 노동을 하기도 하고 운행중에는 한 여름이라도 물을 주지 않기도 합니다. 서비스 운행중에 생리현상의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죠. 당연히 전날부터 금식입니다. 도로 위 배변의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깊이 교감을 나눈 말은 마주(馬主/사람)의 죽음을 인지하여 애도할만큼 지능이 높고 감성적인 동물입니다. 그렇기에 부당하고 괴로운 현실에 반항을 하는 경우도 많기에 아픈 말을 복종시키고 노동으로 굴리려면 많은 폭행이 동반되기도 합니다. 몇해전 뉴욕에서 꽃마차를 끌다 도로에 쓰러진 말에게 관광객이 생수를 입에 부어주었습니다. 얼마나 오래 물을 못 마시고 고된 노동을 했을까요? 쓰러져서 반쯤 기절한 상태에서도 물을 먹으려는 행동에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동물을 먹이, 노동, 유흥의 대상으로만 대하는 세상이 조금씩 바뀌어가기를 바래봅니다. 한 생명체 자체로 사랑하는 세상이 오기를..
뒷이야기 2 >>>>>
좋아하는 건 일로 하지말고 취미로 하라는 말과 함께 정말 좋아하는 남자는 사귀지 말고 친구로 오래 곁에 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근데 전 정말 말 잘 통하는 남사친이랑 결혼도 해버렸어요. 친구는 잃었지만 친구 같은 배우자가 되어서 이것도 꽤 괜찮은 것 같아요. 우정 대신 사랑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래 같이 살아보니 이건 우정인것 같아요. 좋아하는 사람과 일상에서 세속적으로 살다보니 '이루지 못한 첫사랑 같은 상상의 이미지'가 사라진 것 좀 아쉽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