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는 나에게 치료제였다.>
매일 갓생을 살며 낭비 없는 시간으로 채워진 나에게 의외의 모습. 나는 매일 술을 마셨다.
스스로도 부끄러운 줄 알아서 어디 가서 말도 못 했다.
오늘에야 고백하는 이유.
나는 이 생활을 벗어나고 싶다.(부끄럽지만 용기를 내고 있다. 세상에 말하지 않으면 나는 멈출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나에게 이제 필요한 건 무엇을 더 해내겠다는 결심보다 어떤 것을 안 해보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더함이 아니라 덜어냄이 필요하다.
며칠 전 팀 회식이 있었다. 한 해를 돌아보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 올해도 모든 순간 후회 없이 살았어."
(재수 없는 거 이해함)
그러나 단 하나 후회가 있다면, 하지 말았으면 좋았을걸 싶은 나쁜 습관 하나를 내려놓지 못했다.
모든 것을 온전히 잘 해내기 위해서 좋은 습관과 함께 나쁜 습관도 내 속에 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잘 해내지 않더라도, 나쁜 습관이 없는 적당한 삶도 꽤 괜찮지 않을까?
나는 조금 더 가볍게 살 필요가 있다.
내가 빈틈없는 생활을 악착같이 유지하기 위해, 밤이 되면 얼마나 번아웃이 되는지. 완벽한 데이라이프를 만들고 저녁에는 장렬히 전사한다. 매일을 하얗게 불태운다.
좋은 습관 수십 가지를 가졌지만 나쁜 습관 한 가지는 나를 평균적인 인간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탁월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 나쁜 습관 몇 가지들이 나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음주하는 것을 스스로 타협했었다.
하루종일 긴장 속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냐며, 저녁에 먹는 이 술 한잔은 나를 위한 약이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해 왔다. 긴장 푸는 방법을 찾지 못해서 술에 기댔다.
사실 매일이 수능전날도 아니고 나날이 극도로 긴장하며 살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생활에 빈틈없이 완벽해 보이던 아버지도 술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것을 봤는데, 나도 이렇게 술을 마시고 있을 줄이야.
그렇게 술을 저주하며 살아온 인생이었는데, 나는 지금 술에 절어있는 어른이 되었다. 어쩌면 이 유전자는 아주 술을 잘 받는 타고난 체질일지도 모른다.
지난 1년간 어느 정도였냐면, 기억력이 점점 퇴화하는 것을 체감했다. 사실 평소에 기억력이 엄청 좋은 편이라 대체로 기록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외우는 생활을 해오고 있다.
그러나 금년도는 미팅 일정이 헷갈리기도 했고, 대화 중에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답답했던 적도 있다. 평생 다른 사람들이 이러는 걸 보긴 했어도 내가 이런 헐랭이스러운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스스로 좀 충격받았다.
나의 총명함이 점점 사라지는 것만큼 슬픈 건 없었다. 못 생겨지거나 뚱뚱해지는 것보다 머리가 나빠지는 것이 더 괴롭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 음주의 심각성을 점점 깨닫기 시작했다.
2018년에도 술에 반년이상 의존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좀 길었다. 2022년 12월부터 시작된 음주는 꼬박 1년 가까이 매일 밤을 술로 마무리했다.
술을 마시는 순간에야말로 하루 중 유일하게 즐겁고 마음을 편히 내려놓게 되지만, 다음날이 되면 늘 후회하는 마음과 때로는 죄책감이 생기기도 했다. 평소에 완벽하게 나를 통제하는 나로선, 이런 신경교란물질에 의존하는 것이 한심한걸 스스로 더 잘 알기에 괴로움은 점차 커졌다.
남편에게 나 알코올 중독이나 의존증이 아닐까 진지하게 물어봤다.
그래도 남편은 아주 친절하게 위로해 줬다. 술 먹고 꼬장을 안 부리고 매일 적당히(스스로 계획한 양) 먹으니 의존증은 아닐 거라며.
병원에서 의존증 진단을 받지 않았지만 나는 술 없이 잠을 못 자는 사람이 되었다. 남편의 위로 때문에 자기 합리화를 하긴 했지만 스스로 더 이상 거짓말 하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 병원에 갔다면 의존증이라 진단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신적으로 죄책감이 커지며 점점 멍청해지고 있는 나를 보는 것은 큰 고통이었다. 정서적으로 나를 한심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난 자기애가 줄어들면 또 상당히 못생겨지고 생활에 의욕을 잃는 경향이 있다. 예전에도 이런 순간에 우울증이 왔었다.
대책이 시급했다. 그러나 한번 술에 길들여진 나는 이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다 11월 13일 나는 수퍼울트라급 독감에 걸렸다. 코로나도 비켜간 나인데, 독감은 코로나보다 쎈놈이었다. 일주일 동안 반쯤 죽어지냈다. 술은커녕,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퇴근하자마자 감기약을 먹고 다음날까지 10시간씩 잤다. (아픈 와중에도 미라클 모닝은 했다.)
지금은 독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강제 금주 일주일은 상당히 중요한 터닝포인트였다. 그날로부터 쭉 금주중이다.
겨우 2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하루하루 술을 피하기 위한 나와의 싸움 중이다.
술에 기대기보다 스스로 일어서고 혼자의 시간을 의미 있게 만들고 싶다.
너무 과하게 노력하기보다 조금 더 스스로에게 여유와 여지를 주며 빈틈없이 나를 쥐어짜지 않으려고 한다. 매일 요가에 집착했지만, 아픈 중에 요가를 이틀정도 쉬었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조금씩 변수와 너그러움을 인정하기로 한다. 스스로 여유가 생길수록 굳이 술이라는 나쁜 습관으로 릴랙스를 할 필요가 없다는 걸 느낀다.
고무줄은 팽팽히 당겨지면 끊어진다. 적당한 강도로 당겨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나의 내년은 갓생이 목표가 아니라 나를 적당히 당기겠다는 마음이다.
좋은 습관 백가지 만들기와 하루를 빈틈없이 알차게가 아니라, 조금은 시간을 낭비할 자유를 갖고 그 여유 속에서 오히려 나쁜 습관을 하나 걷어내어 보자고 생각 중이다.
P.S.
독감 이튿날 솔직히 너무 아팠다.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나에게 오늘 무조건 해야 할 일들(그냥 혼자 약속한 일, 다른 날 해도 됨)이 있었고, 아픔으로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쥐어짜며 그날 하루를 마치고 집에 와서 기절한 듯 쓰러졌다. 다음날 아침에도 너무 아파서 화장하려고 들고 있는 브러쉬가 덜덜 떨릴 정도였다.
아파서 조퇴한다고 병은 낫지 않는다며 무리했다. 그러나 그날 밤 더욱 많이 아팠다.
굳이 무리할 이유가 있었을까?
팀장님도 제발 집에 가라며 등 떠밀었지만 무식하게 앉아서 일을 했다.
마우스를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가 식어서 몸이 떨리다가 이러다 죽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뼈 마디마디 아픔을 견디며.
늘 이렇게 무리하고 사소한 일들부터 중요한 모든 일들까지 강약 없이 강강강하게 나를 사지로 몰아가며 살았다. 그렇게 저녁이 되면 나의 긴장의 고무줄은 끊어진다. 그렇게 평소의 나는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완벽한 하루를 보내도 밤만 되면 술에 의존하던 바보 같은 생활이었다.
나는 이 긴장의 고무줄을 조금 더 느슨히 만들 필요가 있다. 나의 스트레스를 술로 풀지 않을 생활의 여유가 필요하다.
아프면 조퇴해도 되고, 힘들 땐 미라클 모닝을 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생활을 완벽하게 재단한 듯 똑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몸과 마음 상태에 따라서 다양하게 조절할 수 있는 융통성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