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라는 낭만을 아는 사람이 부럽다.>
어쩌면, 솔직히 말해 행복은 비효율에서 오는지도 모르겠다.
엄청난 효율 속에서 갓생 살았다 싶은 느낌을 좋아하긴 했지만 가끔 인간미 없이 '속도전'에만 목매는 내가 피곤해 보인다.
느리게 주변과 조화롭게 지내봐도 될 텐데.
요즘 같이 바쁜 세상에는 그런 여유 있는 사람이 참 귀하다.
분주하기는 쉽지만 여유 있기는 어렵다.
게으르기는 쉽지만 여유 있기는 어렵다.
주변에 여유 있는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게으른 자신을 잘못 포장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진짜 여유라는 낭만을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멸종 위기에 가까운 종을 대면하는 것만큼 쉽지 않다.
나는 게으른 것이 싫어서 달리고 있다.
여유를 어떻게 부리는지 몰라서 달리게 됐다.
멈춰서 속도를 늦춘다고 해도 나는 여유를 만끽할 방법을 모두지 모른다. 여유를 즐길 수 없기에 게으름이 나를 잠식할까 봐 그냥 분주할 뿐이다. 어디로 어떻게 왜 달리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인생의 풍경을 즐길새 없이 앞으로만 위로만 가버렸다.
주변을 보며 즐겁게 일상의 여유와 낭만을 즐기는 느낌은 어떤 건지, 어느 정도의 속도로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또는 오히려 어떤 것을 안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
여유 없이 효율만 향해 달릴 때,
세상과 거리를 둬야 했고,
차가운 표정으로 뒤나 옆 주변은 살피지 않으며,
앞만 보고 나 자신만 생각해 왔다.
여유가 뭔지 모르니 속도를 늦춘다는 것은 나태함이라 생각했다.
느리고 방탕한 시간을 보낼 바에야 바쁜 게 낫다며 스스로 몰아치고 있었다.
사실은 풍류를 즐기는 방법을 모를 뿐. 나도 사실 쉬고 싶다. 선비처럼 정자에 앉아 스치는 바람과 흐르는 물을 보며 살아있는 순간을 인지하고 차 한잔 즐기고 싶다.
그러나 살아오는 내내 찬란만 빛만을 원했고 결과만 논했다.
나에겐 소박함도, 과정의 미학도 무시되기 일쑤였다. 즐기고 여유로울 곳에 할당할 시간이나 에너지도 없었다.
모든 시간과 에너지는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곳에 모조리 투자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살아가는 많은 순간에 선명하게 남은 감동들은 늘 효율과는 동떨어져 있을 때였다.
좋아하는 이들과의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막차가 끊겨 눈길에서 1시간 넘게 택시를 잡기 위해 고생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택시를 타고 새벽에 달려간 그곳은, 외진 곳이라며 회차하는 택시비까지 과잉 요구했던 것을 감당하고도 사랑하는 얼굴을 봐서 행복했다.
내가 책임질 필요도 없는데도 꺼져가는 생명을 구조해 온 힘을 다해 치료하고 입양 보내거나 입양한 고양이들.
금전적으로 따지면 손해고, 시간으로 따지면 낭비고, 에너지로 따지면 비효율이자 결과로 따지면 남는 건 뭐냐 싶은 것들.
이런 순간들이 나에게 숨 쉴 수 있는 구멍과 살아있는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물리적인 성과와 상관없었다. 나를 따뜻하게 했고 너무 소중해서 전혀 아까운 투자라 생각하지 않았다.
예전 L리조트에 머물 때 얘기다.
한 노신사는 조식 시간에 나에게 웨이팅 줄을 양보했다. 나는 늘 젊은 싱글 여성으로서 노인에게,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여성에게, 몸으로 덤비는 남자들에게 양보하는 삶을 선택당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어르신에게 선량한 양보라는 배려를 받았던 그 순간이 너무나도 신선했다.(서로 먼저 가라며 한참 실랑이도 했다.)
나이가 들었지만 누군가를 배려하여 양보할 정신적, 신체적 에너지가 있는 그 여유가 멋졌다. 별것 아닌데 고맙고 따뜻해서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순간이다.
그분을 만난 이후로 나는 더욱 기꺼운 마음으로 공공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기다려준다.
예전처럼 힘없는 약자이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닌, 내 마음을 다해 타인을 배려한다.
하루종일 너무나 피곤에 절어있어 내가 먼저 지하철을 타고 싶고 개찰구를 통과하고 싶고 빈자리를 찾고 싶지만 그러지 않는다.
배려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에 에너지가 상당히 많이 필요하다. 퇴근 후까지 그 마음을 유지하기란 상당히 어렵기도 하다. 그러나 절대 자리에 앉지 않겠다와 남을 밀치며 서있기 좋은 자리를 확보하기 않겠다는 마음을 가진다. 여유 부리며 사는 법은 잘 모르지만 이런 사소한 비효율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행복한 따스함은 비효율에서 오는지도 모르겠다며.
때론 비효율을 선택할 수 있는 여유를 생각해 보게 된다.
불편 속에서 기쁨이
일탈 속에서 쾌감이
비격식에서 신선함이...
기다릴 줄 알고
양보할 줄 알고
한 발 물러서는
어쩌면 효율과는 거리가 멀고 시간이나 에너지가 더 들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행동.
이렇게 의식적으로 말하면서도 내일도 내년에도 나는 효율에 미쳐 살 것이다.
그렇지만 생활에서 사소한 여유를 찾고 싶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효율과 동떨어질 때가 많다고 해도.
필요 없고 쓸모없는 선물을 받았지만, 그것을 고르는 상대방의 마음을 생각하며 따뜻했다. 인턴사원이 테이블을 정리해 주고 (그다지 필요없는)네임택 라벨링을 해놓은 것을 보고 너무 귀엽고 소중해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또박또박 쓴 손글씨가 참 귀여웠고 고마웠다.)
돌아보면 많은 비효율 속에서 자주 가슴이 뭉클했다는 것이 떠오른다.
효율로 가득한 세상에서 이런 비효율이 있어줘서 다행이다.
효율적인 생활이 자기만족이었다면, 내 마음의 빈 구석을 채우는건 비효율이었다.
이 글을 쓰며 10년전 만난 인턴사원의 글자가 떠올라 다시 마음이 따뜻해 진다. 딱히 시키지 않았고 필요하지도 않은 라벨링이었지만, 힘들때마다 출근하여 마주한 그날의 라벨링을 떠울리면 기분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