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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인미D Jan 27. 2024

10.이 옷은 나를 도시에 붙들어 메고 있다.

<옷의 TPO에 내 라이프 스타일을 맞춰버렸다.>



가끔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 

내가 하와이에 가서 산다면? 제주도에 내려가서 살게 된다면??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신발은 모조리 쓸모없는 것들이 된다. 그 결말이 옷이라니 참 어이가 없다.


 하와이에서 가장 실용적인 신발은 크록스라고 한다. 

이우일 만화가가 하와이에서 잠시 살던 시절을 그린 만화 에세이를 읽고 심란해졌다. 그 자유로운 일탈이 너무 부럽긴 한데 나는 그렇게 살 수가 없다. 내겐 거기서 입을 옷이 한벌도 없다.

습한 바다와 땀이 줄줄나는 여름밖에 없는 도시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을 수 없다.

요즘 옷들은 시즌리스(seasonless)로 나오기는 하지만 휴양지 모래사장에서 혼자 힐을 신고 구찌 트위드를 셋업으로 입는 여자가 제정신으로 보일까 싶다.


 게다가 제주도에 내려간다면 지금 가진 실크 의류와 구두를 관리하며 어디에 신고 다닌단 말인가? 

10년 전쯤, 제주도로 발령이난 친구 집에 며칠 놀러 간 적이 있다. 친구가 출근한 사이 제주도에 도착해 그녀가 준 주소를 들고 아파트를 찾아갔다. 

그 집에 들어가 가장 신기한 것은 모든 가구의 옷장과 서랍이 모두 열려있었다는 점이다.

아침에 급하게 출근하느라 많이 바빴나? 싶었다. 여고생 때도 약간 헐렁한 친구였다.

현관 신발장은 아예 문짝을 뜯어져 벽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고장 난 것을 방치해 둔걸로만 생각했다.

안방에 짐을 풀러 들어갔더니 제습기가 강하게 틀어져 있었다. 지금처럼 제습기가 보편화된 시절이 아니어서, 그것조차 그녀가 바쁜 출근을 준비하며 깜빡 잊고 간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면 전기세가 많이 나오는데 싶어 전원을 끄기 전에 혹시 몰라 카톡을 보냈다.

"너 아침에 진짜 바빴나 보다ㅋㅋ 옷장 문 닫고 제습기 꺼줄게."

그렇게 다급하게 도착한 친구의 문자.

"끄지마~~~~~~~~ 그거 일부러 켜놓은 거야. 옷장문 닫지마."


그렇다. 모든 것은 의도한 것이었다.

그녀가 처음 제주도에 발령이 나서 이사를 갔을 때, 육지에 살 때처럼 옷장과 신발장 문을 모두 닫고 제습기 없이 몇 달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집안을 살펴보니 집기며 의류, 신발, 가방에 모두 곰팡이가 피어 못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육지에서 배에 실어 힘들게 가져온 모든 옷과 신발은 폐기 처분을 하고 새로 구입했다는 슬픈 경험이 있었다.

그때부터 집안 가구들은 모두 문을 연채 제습기를 24시간 풀가동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포기했다.

제주 생활에 대한 로망을...

이 섬에서는 내 아름다운 옷들은 모두 쓸모없는 천 쪼가리라니.


지금 가진 옷들의 쓸모는 어쩌면 내가 서울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 옷들은 다시 나를 도시에 붙들어 메고 있다. 도시를 벗어나고 싶다고 하면서 옷들로 인해 나는 이곳 외에 어울리는 곳을 찾을 수가 없다.



 럭셔리 옷은 내면을 효율적으로 가시화하는 장점도 있지만, 사실 좋은 옷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점에서 포기할 수가 없다. 이 옷들이 나의 고된 직장생활을 견디게 해 주었다. 

나의 실력을 극대화할 아웃핏을 보여주는 도구라는 건 회사보다 학교에서 많이 느꼈다. 교수는 학생들의 롤모델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되고 싶은 아이콘이 되면, 그들이 나처럼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그저 수업 열심히 듣고, 자기 계발 열심히 하라는 말로는 힘이 없다. 

이미 그들이 원하는 모습이 되어있는 것으로 충분히 동기 부여가 된다. 내가 회사에서 잘 나간다는 것을 말로 해봤자 같이 일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때 나는 열심히 아웃핏을 꾸미는 것도 교수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우상화하면 행동뿐 아니라 습관이나 생각까지 미러링 하고자 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들도 갓생을 살기를 바랐다.

현직 디자이너가 럭셔리 제품을 착장하고 대학 강의를 나오는 모습에서 프로페셔널을 무의식적으로 목표삼을 수도 있다. 오글거리긴 하지만 정말 많은 학생들로부터 송구할 만큼 강의에 대한 찬사를 받았고 나처럼 되고 싶다고 했다.


 도시에 최적화된 이 럭셔리 옷들은 가장 바쁘게 살고 있는 지금 이 시기를 나와 함께 보내고 있다. 더 성공하고 유능해지라며 나를 푸시하는 느낌이다. 

옷에 무슨 영혼이 있냐 하겠지만, 질 좋은 럭셔리 브랜드들은 에너지가 있다. 그에 걸맞게 내면의 실력을 갖추지 못하면 그 무능은 2배로 폄하되어 겉치레나 하는 바보가 된다. 반면 겉모습에 걸맞은 능력을 보여주면 주변에서는 더욱 우수한 이미지를 갖게 된다. 이로서 업무 실력도 자기 관리도 잘하는 유능한 인재의 모습을 더욱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옷들은 이 도시를 벗어나는 순간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게 무서워서 종종 나이가 들어서도 멋지게 꾸며 입는 셀럽들을 SNS에서 찾아본다. SNS 속 패션 시니어들은 나이가 들었다고 펑퍼짐하고 편한 신발만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80대 백발이 되어서도 힐을 신고 몸에 촥 감기는 옷들로 멋짐을 뽐내고 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내가 갈 곳이 없는 시니어가 되어도 나는 매일 그렇게 멋지게 꾸밀 수 있을까? 

사실 평소에는 멋진 모습을 추구하지만 주말에는 잠옷을 입고 뒹굴 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고 지금처럼 나의 유능을 인정받지 않아도 될 때 부지런히 패션 그 자체를 더 즐길 수 있을까?

문학에서 참여시, 순수시를 나누는 것처럼.

나의 패션은 참여패션에서 패션 그 자체만 사랑하는 '순수패션'으로 넘어가 그들처럼 부지런이 옷 자체를 즐기고 사랑하고 싶다.


 SNS의 실버 모델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노인들과 참으로 다르다. 그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도 저렇게 살 수 있을까?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희망하며 어쩔 수 없이 나는 이 도시에 머물 수밖에 없다.


 장소는 우리를 삶의 방식을 규정한다.

시니어 모델을 하는 곳은 펑퍼짐한 일상 속에 있는 노년 생활은 아닐 거라며, 그렇게 모델 공부를 시작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사실 모델이 목표라기보다 패션을 즐기는 사람으로 남고 싶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서 한껏 꾸민 일이 무의미하지 않도록, 차라리 그것이 내 업이 되거나 내가 아이콘이 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계속 패션을 즐기는 열정을 잃고 싶지가 않다.



 만약 내가 노후에 귀농이나 텃밭을 가꾸며 라이프스타일 자체를 바꾸면 이 옷들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느긋하고 킨포크적인 삶을 꿈꾸기도 하지만.......음........

내가 즐기는 패션 스타일은 내가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이 충돌하고 있다.

킨포크적인 삶에서 필요한 패션은 지금처럼 관리가 어려운 화려한 옷들이 아니다. 작은 텃밭을 가꾸고 자유롭게 잔디밭에 드러누울 수 있는 옷은 내추럴하고 실용적인 옷들일 것이다.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이 옷들을 맞지 않게 만들 수가 없다. 

이 옷의 쓸모를 위해 어쩔 수 없다. 노후에도 도시에서 몸빵 하며 달리는 소셜 네트워크 속에서 일을 할 수밖에. 옷의 TPO에 내 라이프 스타일을 맞춰버렸다.

자연에서 유유자적하기에는 이 옷들은 맞지 않다. 화려한 옷을 즐기기 위해 화려하고 바쁠 수밖에.


 사람들에게 치이는 삶이 싫고 도시에서 멀어지고 싶다고 하면서도, 이것들로부터 멀어질 수 없는 이유가 이 옷 때문이라면 어이없지만 사실이다.

이 옷들은 나를 도시에 붙들고 있기 때문.

이 도시에서는 목가적인 삶이 아니라 분주하게 달리는 삶을 살수 밖에 없다.


 이 옷을 나를 맹렬히 뛰게 만들고, 열심히 뛰는 이곳에 어울리는 이 옷은 다시 나를 여기서 정신없이 쫓기며 살수 밖에 없게 만들고 있다.


이 도시와 내 옷과의 관계_나는 벗어날 수가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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