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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인미D Feb 12. 2024

69.좋은사람 아니고 좋아하는 사람

<신 조차 안티가 있는 마당에 내가 뭐라고...>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되려 해서 괴롭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내 욕망을 잘 억제해야 한다. 상대편이 원하는 것을 예측해서 말과 행동에 경계를 하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표현해야 한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이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이 아니라 호감을 사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무리하게 노력하고 만다. 자연스러운 자신의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좋은 사람인척 유지하는 가면은 본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이나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순간에 드러나고 만다. 상대편이 그간 가식을 떨어온 그 진심을 알고 나면 오히려 얼마나 더 가증스러울까? 


 게다가 내가 좋은 사람인척 말과 행동을 조정한다고 한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호감을 얻을 수는 없다.

타인의 눈치를 보며 비위만 잘 맞춘다고 모든 이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행동은 대체로 많은 사람들에게 무책임하고 회색인간이라는 불만을 일으킬 수도 있다.


 어제 아동심리 치료를 하는 친구와 브런치를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오히려 자녀에게 끌려다니며 맞추기만 하는 양육태도가 자녀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부모가 모든 것을 자식에게 맞춰준다고 불만이 안 생기는 것이 아니며 되려 그들의 행동이나 성격에서 결함이 발생하여 심리 치료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모든 것을 내가 원하는 대로 왕처럼 가질 수 있다고 행복하고 완벽한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어느 정도의 결핍을 인정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장할 수 있다. 

처음부터 완벽이 아니라, 결핍 속에서 완벽을 꿈꾸며 수정하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만족감을 얻고 행복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런 극복의 힘은 인생 전반에 있어 다양한 문제를 직면할 때 슬기로운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준다. 아무리 어려운 순간을 맞이해도 언젠가는 지나가기 마련이라는 건강한 마음의 힘을 가질 수 있다.

불행을 피하겠다는 헛된 망상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잘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행복의 원천이 아닐까 싶다.


 세상은 수동적으로 타인 눈치만 보고 맞추기만 하면 솔직히 자신은 편할 수도 있다.

내 생각이나 행동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설득과 타당한 논증이 필요한데, 이것은 오히려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힘든 노력과 귀찮은 수습과정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 귀찮아서 말로만 주장하고 검증하지 않는 게으름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똥고집 혹은 꼰대'라고 부른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행동의 과정으로 결과를 만들어내야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가끔 말뿐인 허세와 착각 속에 빠진 사람들이 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호감은커녕 세상에서 거리두기 당하고 있을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자기 의견을 행동의 결과로 검증하는 그 과정이 번거롭고, 혹은 잘못되었을 때 비난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타인에게 맞춰버리는 경우가 많다. 

말로 억지 부리는 게으른 꼰대만큼 심각한 사람이 게으른 좋은 사람이다.

이들의 눈치보기는 정말 배려해서 하는 행동이 아닌 경우가 많다. 설득할 자신도 없고, 검증할 노력도 귀찮아서 대충 편하게 선택해 남에게 맞출 뿐이다. 

이런 수동성을 기반으로, 편하려고 타협해 버린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칭호를 주기가 어렵다.

자기 노력이나 의견 없이 상대편에게 끌려다니는 상황만으로 좋은 사람이 되기 힘들다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런 수동성에서 자기 자신도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은 없다. 그냥 회피해 버린 현실이 있을 뿐.

우리는 어떤 일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해결해 날 때 삶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


오히려 모두를 위한 좋은 사람은 될 수 없는 유니콘일 뿐이라는 걸 받아들이면 편하다. 

(예수, 부처조차 안티가 있다.)

현실적으로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일부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다.


 진짜인 관계를 제대로 만들고 지속하려면 때로는 단호하고 표현은 정확해야 한다. 나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상대편을 '배려하고 예의'를 지킬 때 진실된 관계가 유지된다.

상대편도 언제 진실이 폭로될지 모르는 가면 쓴 가식덩어리와 피상적인 인간관계는 내키지 않을 것이다. 그 가면은 언제든 벗겨지기 마련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자신을 드러내면 된다. 서로의 결핍을 인지하고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 진짜 인간관계가 탄생한다. 다만 그렇다고 막돼먹은 행동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며 어느 정도 사회 협의 속에 있는 매너와 배려는 지켜야 한다. (주의! 이게 나라며 상식이하의 자신을 그대로 상대편에게 무조건 포용하길 바라는 방종이 아님)


 우리는 모든 관계를 호감으로 형성하기 힘들다.

차라리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 

내가 판단한 단 하나의 기준이나 내가 선택한 단 한 사람만을 만족시키고, 나머지를 내려놓으면 된다. 그러면 진짜 하나의 사건은 제대로 흘러가며, 단 한 명의 사람에게 신뢰를 얻어 깊이 있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원래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평균값의 행동은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도 않고, 아무도 행복하지 않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회피적 선택'은 문제를 직시할 수도 없으니, 상황을 잘 해결할리 없고 늘 도피하거나 어정쩡한 상황으로 무마될 뿐이다.


 좋은 사람인척 유지하기 위한 우유부단함이 오히려 모든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여기서 만족은 본인만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스탠스를 유지했다는 자기만족.

그렇게 모든 이들에게 호감을 얻으려는 노력은 자기 착각 속에서 대실패로 끝나게 된다. 아무도 만족하지 못했고 아무에게도 호감을 얻지 못했다.


 이 눈치는 단순히 말하면 진실된 호의가 아니다. 관계에 있어서 서열이 있고, 그 안에 자신을 지키고 이익을 계산한 나름의 전략적인 행동이다. 

어차피 직접 부딪혀 봐야 얻을 있는 이익이 없다고 생각되면 그냥 자신의 생각을 죽이고 상대에게 맞추는 척해서 호인의 이미지를 만든다. 그러나 이런 가짜 이미지는 오래가지 못한다. 사람은 24시간 경계하며 자신의 본성을 숨기기 어렵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고 싶은 말을 참고, 호의를 베풀고, 눈치를 많이 봐야 한다. 내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 나의 모든 욕망을 재단해야 한다. 

타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참으로 피곤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상은 진짜 자기의 의견이나 생각을 평생 모른 채로 우유부단함으로 주변을 답답하게만 할 수도 있다.

주변은 호감대신 반감이 가득할지도 모를 일.



생각을 바꿔서,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는 노력을 나에게만 잘 투자해도 의외로 '세상이 좋아하는 사람'이 된다.

세상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 역시 상당히 피곤하긴 하다. 

조금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자신을 가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을 성장시키고, 나의 행동을 첨예하게 다듬을 수 있는 자기 계발을 꾸준히 해나가야 한다.


그러나 '좋은 사람'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남는 게 많다.

1. 좋은 사람을 위해서는, 내가 희생하고 수동적으로 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2. 반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은, 내가 나에게 투자하고 노력하여 멋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본질은 타인의 눈치에 에너지를 쓸게 아니라 자신을 잘 만들어내는데 투자하는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다각도로 자신을 규명할 수 있는 여러 가지를 몸소 체득하는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되어 남는 것은 실체 없는 눈치보기. 게다가 이들은 의견도 솔직히 말 못 하는 호구 취급 당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나서 자기 의견을 발언하면 지각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내가 바라는 행동을 선택해도 카리스마 있다고 인정받는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억누르고 맞추기만 한 채 일일이 사랑을 갈구할 필요가 없다. 

정말 나 자신을 잘 가꾸어 멋진 사람이 되면 좋은 사람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된다.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를 필요라는 목적성으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은 관계에서 이익이 있는 쪽을 더 좋아한다. 눈치를 보며 의견도 못 내며 다 맞추는 사람보다는 생각에서 배울 점이 있는 사람과 행동으로 문제를 직접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좋은 사람의 스탠스는 자신이 없을 경우 자주 취하는 형태다.

실력을 갖추게 되면 당당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남을 위해서 눈치를 보면서 맞춰야 할 이유는 없다. 내가 선택한 말과 행동을 결과로 증명해 낼 수 있는, 실력이라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 있어야 가능하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의 열망 속 진실은, 사실 본인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실력이 떨어지기에 서열에서 열세인 상황에서 생존으로 선택하는 수동성일수도 있다. 

욕을 먹을까 봐 억지로 선택하는 양보일 수 있다. 

좋아서 기꺼이 하는 배려와 양보가 아니며, 타인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나약한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미흡한 감정을 세상과 주변이 못 느낄 리 없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양보하고 퍼줘도 주변에서 좋아해 주지 않는다.


 자신이 여유가 있어서 기꺼이 업무를 대행해 주거나, 내 지분의 혜택을 양보하는 진심과 다른 선택이다.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사실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 그냥 자신의 안전지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선택하는 '자기 억제'이다. 

실력의 약자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좋은 사람의 가면을 쓰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양보하면서도 억울해하고, 할 말을 참거나 거절하지 못해서 괴로워한다.

아무래도 좋은 사람 스탠스를 취하면 호감은커녕, 타인은 그저 이런 사람을 쉽게 대해도 되는 자기 의견도 없는 하찮은 존재로 보기 쉽다. 

자기 색깔이 없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누구나 타인의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기왕 써야 할 에너지라면 좋은 사람인척 하기 위해서 쓰기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자기 성장에 에너지를 쓰는 게 궁극적으로 낫다.

물론 좋은 사람인척은 잠시 참는 수동성으로 끝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면 능동적으로 어떤 실체를 만들어내기 평생 노력해야 하므로 에너지가 장기적으로 요구된다. 상당히 피곤한 일이다.


 사실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내 주변에 나를 아끼는 사람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언제든 이런 좋은 사람을 버릴 수 있고 이용하거나 쉽게 대할 수 있다.

그러나 '좋아하는 사람'이 되면 사람들은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그들이 필요해서라도 좋아하는 사람들 곁에 있으려고 한다. 좋은 사람이건 좋아하는 사람이건 세상 속 관계는 참 슬프긴 하다.


 모든 관계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참는 것에 쓸데없는 에너지를 쓰기보다, 나를 발전적이게 만드는 것에 에너지를 쓰면 좋겠다.

솔직히 참는 것의 에너지가 결코 작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이 수동성을 효율이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억지로 양보하고 참을 때 서러움과 억울함을 누르는 분노의 힘은 엄청나다. 차라리 그 힘을 자기 속으로만 품을게 아니라 내가 성장하는데 써버리고 발산하는 편이 훨씬 낫다.

내가 참고 괴로워해봐야 스트레스나 받고 내 건강만 상하고 남을 게 없다. 

그러나 나 자신을 만드는 것에 에너지와 노력을 투자하면, 평생 쓸모 있는 실체 있는 능력을 소장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몸을 움직여 뭔가를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동반될 것이라 까마득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력과 유능함의 순환은 한번 바퀴를 굴리면 선순환되어 비교적 적은 에너지로도 발전적인 움직임을 유지하기 쉽다. 처음 시작할 때의 강력한 장벽만 넘게 된다면 말이다. 

인생은 길다. 

남은 인생을 약자로 선택하여, 참으며 50년을 살아도 세월은 흘러간다. 십 년, 이십 년 노력해서 멋진 사람이 되면 내 인생의 주도권은 줄곧 내 손에 있다. 


 미움 안 받는 좋은사람이 되기 위해 목맬 필요 없다.

가장 나다운 모습을 잘 유지하면서, 실력을 겸비하면 남들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지 않아도 좋아하는 사람이 된다.

사실은 가장 사랑받고 싶어서 애쓰는 사람은 가장 미움받고 하찮게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 인간이란 원래 그렇게 자기만의 아우라 없이 쉬운 사람에게 막 대하는 간사함이 있다.


 누군가를 위해 일일이 맞추는 노력이 아닌, 나 자신을 단단하고 나로서 충분히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간다면 세상은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가 비록 좋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 우아함과 아우라를 동경하며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겠다는 욕심을 내려놓는 순간 진짜 소중한 인연들만 곁에 남아있게 된다.

나의 삐뚤어진 모습, 나의 편협한 사고, 어설픈 실수들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 호감을 느끼면 진짜 관계가 이어지게 된다.

나를 죽이고 빈틈없이 타인에게만 맞춰야 나에게 호감을 유지하는 사람이라면 그 관계는 진짜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유지되더라도 오랜 시간 지속되기 힘들며, 언젠가 진실이 밝혀지면 금방 끝나기 마련인 관계다.


 신神도 안티가 있다는 말을 생각하면 우리가 뭐라고...

그저 남 신경 쓰지 말고 나를 더욱 멋지게 만들기 위해 살면 된다. 우리는 너무 한평생 남눈치 보느라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세상이 내가 좋다면 나를 좋아하며 곁에 머무를 것이고, 내가 싫다면 떠나거나 피상적으로 지낼 사람들이다.



 분노나 슬픔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건설적으로 쓰는 현명함도 필요하다.

그래서 모든 것은 게을러서 될 일이 아니다. 불편한 진실을 회피할수록 사는걸 더욱 괴롭게 된다.

괴로울수록 몸을 움직이고 나를 만드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 낫다.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건 내 몸의 행동이다. 주저앉아 슬퍼해봐야 나아지지 않는다.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것을 향해 내 몸을 움직이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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