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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인미D Jul 20. 2024

1.무서워서 살기 싫지만, 죽고 싶진 않아.

<우리가 우주 먼지로 태어난 이유가 있겠지.>


살기 싫은 것과 죽고 싶은 것은 다른 말이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죽음이라는 종착지라는 점에서 같은 뜻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살기 싫음과 죽고 싶음은 엄연히 다른 뜻을 품고 있다.


        살기 싫음 ≠ 죽고 싶음


살기 싫음은 죽음에 대한 수동이다. 삶의 지속성에 대한 의지는 포기지만 적극적으로 죽음으로 가기 위한 능동적 과정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사는 것을 포기하고 싶을 뿐 죽음을 선택하고 싶지도 않은 상태.

마음 속 깊이 삶과 죽음 둘 다 동시에 거부하는 상황이다.


반면 죽고 싶다는 것은 삶의 포기라는 관점을 담아 능동적인 죽음의 행태를 선택하겠다는 의지를 포함한다. 


그래서 살기 싫다는 말은 다른 말로 죽기 무섭다는 말과 일맥 상통한다.

살기 싫어 = 죽기 무서워 = 가능하면 살고 싶어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삶의 굴곡들을 겪어가며 살기 싫다는 생각을 가끔씩 했다. 그러나 죽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살아있는 상태가 멈추어 지금 느끼는 괴로움을 끝내고 싶었을 뿐.

그러나 죽을 용기도 없고 죽는 것도 무서우니 고통을 느끼며 살아나갈 수밖에 없었다.


힘든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삶에 대한 이해와 납득이 필요했다. 그 어떤 언어로도 위로되지 않았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머리로 이해되는 합리적인 납득이었다.


자연의 흐름은 변수가 없다. 물론 인간사 희롱하듯 하루하루 날씨가 오락가락 하지만 기본 이치에 따른 큰흐름을 순행하고 있다.

아침에는 해가 뜨고 저녁에는 해가 진다. 귀찮다고 계절을 건너뛰거나 더디 바뀌지 않는다. 우리의 삶에도 그런 흐름이 있다. 캄캄했다면 밝아지고, 추웠다면 따뜻해질 때가 있다. 무조건 오르막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리막 길만 지속되지 않는다.


우리의 기분도 그렇다.

어느 순간이 되면 해결이 되지 않았던 일들도 자연스럽게 손에서 놓고 흘려보낼 수 있을 때가 온다. 답답했던 일들이 남아있지만 한결 마음이 괜찮아지기도 한다. 감정 상태는 의지만으로 바꾸기가 쉽지 않다. 눈 녹듯 납득이 되는 가 있다.


물론 성공을 쟁취하고 사고를 피하기 위해서 명리를 접하기도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마음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서 사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가 많다. 

부와 성공도 결국은 행복이라는 상징적 약속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행복만 보장된다면 성공이나 돈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방법을 모르기에 우리는 물질적인 것을 손쉽게 추구하게 된다.


명리의 기본은 음양과 오행의 자연이치를 이해하여 인간계에 치환한 실용 철학이라고 볼 수 있다. 

미신도 아니고 신내림이나 점도 아니다. 명리학은 그저 사대부들이 공부하던 인간 철학 학문일 뿐이다.

우리도 크게 보면 자연의 일부고 우주 크기에 비하면 우주 먼지 사이즈도 안 되는 미미한 존재지만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함께했던 우주와 자연의 기운을 품고 탄생했다.


나의 운명을 제대로 바라보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받아들이고, 삶에 대한 태도와 방향을 이해하게 된다.

추운 날은 옷을 껴 입고 더운 날은 시원한 곳을 찾아가면 된다.

아픈 날은 웅크리고 휴식을 취하면 되고 사랑받고 잘 나갈 때는 겸손한 마음으로 적극 달려 나가면 된다.


내려갈 때는 아쉽지만 모든 걸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올라갈 때는 힘들지만 희망적인 마음으로.

내리막 앞에서는 현실을 비관하기보다 올라갈 날을 위해 준비하고 비축하며 내실을 다지는 시기로 만들면 된다.


운명이라는 기본 흐름이 있다고 하지만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가질 수가 없다. 인생이 확정형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세상사 그렇게 만만찮지 않다. 

아등바등 1만큼 노력해도 1만큼 결과를 얻을까 말까인데 한 거 없이 1을 얻는건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런 마법은 일어나지 않는다.


명리학은 사주팔자라고도 불린다.

운명이 정해져 있으니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일주)만 부여받았뿐 나머지 오르막과 내리막의 길은 내가 직접 가야할 방향이다. 결국은 나 자신을 데리고 올라도 가고 내려도 가야 어디로든 도착할 수 있다.


우리는 올라갈 때 더 나은 곳으로 가고 있기에 고된 상황을 즐길 수도 있고 혹은 힘든 순간에 있다고 불평할 수도 있다. 내리막 길을 내려갈 때 부담 없이 편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가진 것을 버리고 아래로 내려가기에 우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모든 사건은 양면성을 띠고 온다.

잘 쓰면 나를 지키는 무기가 되고 잘못 쓰면 나를 해치는 흉기가 된다.

무조건 좋을 일도 마냥 나쁠 일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르막과 내리막, 밝음과 어두운 순간을 인정하며 나를 달래고 지켜내는 타이밍을 이해함으로써 삶에 대한 비관을 줄일 수 있다. 

그리고 지름길을 찾거나 그나마 경사가 덜한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자중할 때와 적극적일 때에 맞춰 움직일 수 있고, 어쩔 수 없이 괴로움을 겪게 된다고 해도 다음번 기회를 꿈꾸며 용기를 낼 수 있다.


나에게만 이런 일들이 생기겠는가? 

우리는 모두 같은 우주 속에 살고 있다. 다들 자기만의 괴로운 우주 속을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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