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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치앙마이 요가 리트릿 특별편3

끝이 허무하지 않는 여행을 시작하는 법

by 전인미D

리트릿이란?

미국과 유럽에서 형성된 삶에 효과적인 변화를 가져다주는 시간 및 프로그램을 이름. 단순히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 이상으로 온전히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휴가와 구분된다.



긴 여행이 끝날 때 오히려 불안이 밀려오거나 허무해지는 경험을 한 적이 많다.

다들 그럴 것이다. (남편은 예전에 귀국 비행기만 타면 그렇게 우울했다고 한다.)

그건 우리가 여행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치유하는 시간을 가진 게 아니라 일상에서 잠시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도피만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여행 끝에 찾아오는 현실의 무게는, 그 속에서 계속 살아갈 때보다 더 괴롭게 느껴졌다. 마치 술을 마실 때는 좋은데 다음날의 숙취와 무기력함이 후유증처럼 남듯.


일상을 벗어나는 것을 갈망하면서도 섣불리 여행을 갈 수가 없었다. 허무 뒤에 맞이하는 현실은 더 슬프기만 했다.

어릴 때 여행은 분명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고 즐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직장인이 된 이후의 여행은 일단 강제적으로 환경을 바꾸어 현실을 잊고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여행 없이는 회사 일과 현실의 부담스러운 과제를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잠시 벗어난다고 없어질 현실의 무게가 아니다. 다시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현실로.


이 요가 리트릿 공지는 작년 가을에 우연히 발견했다.

그저 여행 가듯 해외에 나가서 요가를 하고 리조트에서 쉬는 거라고 생각하고 신청했다. 여행 다닐 힘도 없는데 가서 좀 늦잠도 자고 잘 쉬다 오자는 마음.(그러나 이건 착각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신청할 때는 당장 벗어나고 싶은 현실이었다. 후유증을 걱정할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리트릿은 달랐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현실로 돌아온 뒤 허무에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힘과 여유가 훨씬 더 커졌다.

여행이 끝나고 회사로 돌아와 처리할 업무를 바라보며 걱정하기보다,

‘순서대로 하나씩 쳐내볼까?’라는 마음으로 그냥 행동을 믿고 달렸다. 생각보다 빠르고 별 어려움 없이 많은 일들이 해결되었다.

초보도 신입도 아닌데 미리 걱정할 거 없다. 어차피 내가 밀고 나가면 다 할 수 있는 일들인데 뭘 그렇게 늘 미리 괴로워했을까.


이번 리트릿을 통해 스스로 치유하는 휴식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매번 해낼 거면서 스스로 압박하고, 잘하고 있으면서도 앞서 걱정하고,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미리 두려워했다.

이런 고뇌들이 늘 나를 성장시켜 온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 속의 나는 숨쉴틈 없이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현재의 편안함과 여유가 뭔지도 모른 채 늘 숨이 차고 두통과 복통을 동반한 생활이었다. 그렇다고 어딘가 아픈 건 아니었다.

그저 정신적인 이슈.

침착해 보이는 표정 뒤에 늘 초조함을 숨기고, 다 해낼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며 늘 압박 속에서 혼자 외롭고 괴로웠다.


리트릿은 휴식을 추구하는 휴양과 다르고,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떠나는 여행과 다르다.

자신을 케어하고 알아차리는 알찬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한다.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을 추구하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대체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은 어떻게 추구하는 것일까?

오랜 시간 요가를 해왔지만 아직 잘 모른다. 나를 마주할 시간이 없었고, 그런 사치스러운 고민할 시간에 내 눈앞에 있는 일들을 빠르게 해결하는 게 중요했다.

멈춤이 없는 시간 속에서 자신을 마주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단순히 우리는 참선이나 명상을 통해 일상에서 자신을 마주하기는 어려운 상태다.

집중이 어려운 시대가 되기도 했지만, 생각을 비우거나 멈추는 것도 어려운 세상이기 때문이다.

퇴근 후 누가 미쳤다고 핸드폰 대신 참선을 하고 앉았겠는가. 술을 안 마시기만 해도 다행이다.


게다가 매일 일상이 묻어 있는 익숙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갑자기 무언가를 멈추고 나의 내면의 고요를 들여다보는 것은 99.9% 불가능하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치앙마이 리조트,

비일상적인 공간과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는 늦은 밤과 새벽 시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나의 고요와 고독을 가슴으로 느꼈다.

은은한 외로움과 살짝 낯설어서 불안한 감정이 뒤섞였다.

잠이 들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게 없던 칠흑 속에서…. 멍하니 벽을 보며 여러 생각했다가 아무 생각도 안 했다.

단지 그 순간이 너무 벅찰 만큼 좋아서 가슴이 챠르르 떨렸다. 아무것도 할 일도 해야 할 일도 없는 시간이….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고요하게 하기란, 생활의 미션이 쌓인 집에서 하는 게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 리트릿이라는 것을 찾아 떠날 수밖에.

일상을 떠난다고 고요와 치유를 경험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여행 중에 괴로움과 현실의 분노가 끝까지 따라다녔던 적도 있으니까.


생각을 비우고 좋은 기분으로 내면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 이번 리트릿이 그걸 가능하게 해주지 않을까?

기대반 부담반으로 첫날밤을 맞이하며 황홀경에 빠져 잠이 들었다. 알람이 울리지 않았는데도 새벽 4시에 눈을 떴다. 한국 시간 아침 6시였다. 몸이 기억하는 기상시간.

다시 잠들고 싶지 않았다.

평소에서 새벽 놀기를 좋아하는지라 수련을 가기 전 2시간을 혼자 놀기로 결심했다.

노트북도 없고 딱히 할 게 없었다. 책을 읽고 창문을 열어 캄캄한 정글의 소리를 들었다.

치앙마이에서 묵었던 리조트는 북쪽 정글지역에 지어져 창문 밖은 진짜 정글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무서운 건 인간이지 자연이 아니다.


새벽마다 우는 신기한 울음소리를 내는 새. 풀 소리. 나뭇잎이 사각거리는 소리, 물이 천천히 흐르는 소리.

인간이 내는 소리를 제외한 세상의 소리를 즐겼다. 새벽에는 창 밖이 보이지 않아서 귀로 즐겼다.

낮에는 창 밖으로 다양한 새들, 작은 설치류계통의 동물, 물고기들을 구경하며 정글을 방구석에서 즐길 수 있었다.

따뜻한 커피 한잔 타서, 통유리로 된 창밖 정글을 멍하니 구경하다 보면 30분이 몇 초처럼 짧게만 느껴지고 넷플릭스 보다 재밌다는 걸 알게 된다.


생각을 비우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기는 마음먹고 결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의지가 없어서 못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해탈을 한 도사가 아니다. 의지만으로 마음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리트릿이다. 몸을 움직이고 어떤 건강한 활동에 참여하는 실천이 정신적인 변화를 가져오기에 중요한 키포인트가 된다.


몸이 정신을 컨트롤하는 것 같겠지만, 전혀 아니다.

정신은 몸을 따른다.

정신을 컨트롤하기 위해서 몸에게 어떤 미션을 주는 것이 가장 손쉬운 접근법이 된다.


사실 휴식한답시고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있으면 불안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은 핸드폰을 열어 sns구경에 빠져들 수도 있다.

잠시 현실을 무게를 잊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인스타그램 밖에 없는 슬픈 현대인들이다.

그만큼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엄청난 의지로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다고 해도, 무엇으로 나를 치유하고 케어할 수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이럴 때 다양한 리트릿을 체험해 보면 좋다. 건강하게 나를 케어하는 활동으로 시간을 채우는 것이다.

몰랐는데 이번 요가리트릿을 다녀와서 검색해 보니 국내에도 다양한 리트릿 프로그램이 있었다.


마음을 당최 어떻게 씻어낼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그건 현실로 돌아오고 나서 느끼게 된다. 나처럼 너덜너덜 정신이 많이 망가져 있던 사람이라면 그 회복의 힘을 더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일상에서 상당히 정신적인 힘을 회복해 가는 걸 느끼는 요즘이다.

일희일비 안 하는 게 쉽지 않지만 다녀와서 보니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그렇게 크리티컬한 것들이 아니었다.

많은 것들은 시간 속에서 내 손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었고, 내 손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애초에 너무 마음을 쓸 필요가 없다.


피로는 막연히 쉬며 아무것도 안 하는 것만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힘은 스스로 용기를 가지려는 의지만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적극적으로 회복을 위한 활동을 통해 내 속의 어둠을 밝혀 나가면 마음이 점점 단단해질 수 있다.


흙탕물 한 컵이 있다. 이 물을 정화하는 방법은 깨끗한 물을 계속 채워 흙탕물이 희석되면서 컵 밖으로 흘러넘치게 하는 수밖에 없다.

순간적으로 흙탕물을 비워낸다면 빈 컵에는 또다시 다른 흙탕물이 담길 수도 있다. 그저 지속적으로 맑은 물을 부어 물을 정화시키는 것이다.

맑은 물은 스스로 계속 채워 나가야 한다.


리트릿에서 아침수련이 끝나면 카페에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그린 스무디를 마신다.

건강하게 남이 만들어준 햇살이 가득한 모닝스무디가 그립다.

복통도 두통도 변비도 다 낫게 해 준 요가 리트릿.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삶이 무엇인지 잠시 느끼고 돌아와 다시 파워 열일 중이다.

하지만 이전처럼 나는 유약하지 않다.

퇴근하고 나도 쫓겼던 삶에서 이상하게 여유가 느껴진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달라진 건 없다.

그저 마음의 속도가 늦춰졌다.

마음만 늘 달린다고 많은 일들이 빠르게 잘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는데…


리트릿을 다녀와 승진 지원서를 제출했다. 금요일 서류 합격 후 바로 다음 화요일 면접이 잡혔다.

그러나 남편이 주말에 호텔을 예약해 놨다고 했다. 예전이면 거절했겠지만, 도심 속 산장이라는 호텔에서 휴양을 아주 잘하고 왔다. 그리고 면접 준비는 단 하루 만에~

결과가 좋은 나쁘든… 그것이 내 인생을 바꾸진 못한다. 나에게는 더 중요한 가치들이 많다.




비록 물 색은 믹스커피 색이지만 온갖 생명들이 살고 있는 정글의 살아있는 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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