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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우리는 죽음을 걸어야 평화를 이해하게 된다.

<Let them 그러려니.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니잖아.>

by 전인미D

그러려니는 잊어버리기, 용서하기와 다른 관점이다.

기억은 하고 있지만, 용서를 하지 않았지만, 그러려니 하며 그대로 내버려 두는 마음이다.

타인으로 인해 생긴 짜증과 분노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사람들과의 대화는 오해를 동반하고 조금씩 어긋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 기준'에서 바로 잡고 싶어 한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바로 잡고 싶은 건 바로 '내 기준'이기 때문이다.

내 기준의 해명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변명으로 들릴 수 있고, 내 기준의 설득은 타인 기준에서는 반박으로 들릴 수 있다. 타인의 행동은 내 입장에서 불편하거나 불쾌하게 다가올 때도 있다. 그걸 매번 바로잡기 힘들다.

나에게 불쾌한 것들이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고, 내 기준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내 기준조차 변수가 많아서 그날따라 컨디션이 별로라 순간의 감정 탓에 거슬린 것일 수도 있다.


상대편도 자기 기준에서는 그것이 정의였고 가장 최선이었을 거다.

세상 누가 봐도 보편 타당성이 떨어지는 이상한 발언을 했다고 해도, 자기 우주에서는 그것이 정답이라서 그렇게 표출된 말인 거다.

그런 말들에 일일이 응대하며 감정을 쏟을 필요가 없다.

이런 것들을 도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하고 그 문제를 파고 들어갈수록 분노가 커지는 경험을 해봤다.

그라데이션 분노라고 한다.

세상 모든 것들을 걸고 넘어져서 내 우주 속의 정의로 구현할 수도 없다.

그럴 수 있다고 한다면 매 순간 내 우주 정의를 실현하느라 모든 일상과 생업을 내팽개친 채 고군분투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생업이 있다. 모든 일에서 내 기준의 정의를 구현할 수 없다. 많은 것들이 내 기준에 일그러져 보여도 세상은 별문제 없이 흘러간다.

그렇기 때문에 답답해도 참고 받아 들어야 하는 수많은 시간들을 그냥 살아 나간다.

참다가 속병 난다고 도저히 참을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문제도 많다. 그렇다고 모든 순간을 싸워내느라 낭비할 수 없다. 그게 세상의 정의도 기준도 아닌, 다만 내 마음속의 기준일 때가 많고 결국 싸워봐야 나만 도리어 상처받게 된다.

내가 납득을 못하기 때문에 싸움을 걸어 이해를 요구하고 사과를 받아내고 싶다.


살며 마주치는 많은 불합리한 것을 다 바로잡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잊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이미 일어난 일은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고 매 순간 맞서서 내게 맞춰 교정할 수도 없다.

그럴 때는 감정을 좀 내려놓고 그냥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흐린 눈으로 거슬리는 것들을 내버려 두는 지혜도 필요하다.


분노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사건에 에너지를 집중하기보다는 내 다른 삶을 찾아 관심과 사고를 돌려봐야 한다. 화내고 싸워봐야 나만 더 괴로울 뿐이다.

물론 맞서 싸워 해결해야 할 일들도 많지만, 인생의 대부분은 '그러려니 정신'으로 부드럽게 흘려보내도 무방한 것들이 많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기운을 다른 곳에서 더 유용하게 쓸 수 있다.


나는 그러려니가 잘 안 돼서 고통을 자초한다. 그렇다고 맞서 싸우지도 않아서 스스로를 더 괴롭게 한다. 속으로 꾹꾹 참으며 혼자 화내고 미움을 키우는 스타일이다. 이해를 하지도 않고, 터트려 해결하지도 않는 이런 성정은 스스로를 더욱 괴롭게 한다.

용서도, 이해도 안 하는 상태에서 엉켜버린 감정은 나를 하루 종일 체한 느낌으로 고통스럽게 한다.

내게는 그러려니가 몹시 필요하다. 이해할 필요도 없이 그냥 흐린 눈 뜨고 있다가 내가 해야 할 일로 관심을 돌리면 그만이다.


그러려니는 바보라서 하는 게 아니다.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선택하는 길이다.

모든 순간 날카롭게 비판적으로 싸워야 스마트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러려니 이해하고 넘어간다고 나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인격이 잘못된 것이다. 우습게 보이지 않기 위해 매번 나를 내던지며 맞짱 뜰 필요는 없다. 반대로 꾹꾹 눌러 담고 참으며 내 속으로 괴로움을 키워 고통에 몸부림칠 필요도 없다.

그냥 내 손으로 어쩌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러려니 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산다. 나를 위해서다.


모든 걸 기억하는 채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냥 내려놓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속은 부글부글 끓고 오장육부가 뒤틀린다. 무시당하는 느낌도 들고 이대로 넘기면 우스운 사람이 될 것 같다.

그래도 한번 더 나를 위해 하는 선택이다.

Let them. 내가 지금 해야 할 거에 마음을 돌리자.



영화 '멜랑콜리아'에서 한 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중이다. 곧 충돌이 임박했다. 이때 삶의 복잡한 문제들이 오히려 단순해지는 순간이 된다.

행성 충돌로 지구 전체가 종말 하기 직전, 우리를 미치게 했던 문제들은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이 된다. 지구라는 행성의 파멸 앞에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죽어야 평화로워지는 걸까? 우리는 죽음을 걸어야 평화를 이해하게 된다.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흘려보낼 수도 없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죽고 사는 문제인가?



어린 시절 립스틱 사건이 있다.

다섯 살 난 사촌 동생이 놀러 왔다. 이모가 일이 있어 잠시 어린 사촌을 우리 집에 맡기고 몰래 외출을 했다. 곧 사촌 동생은 엄마의 부재를 깨닫고 칭얼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내 어머니는 얼른 사촌동생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여러 가지 물건을 동원했다. 그러다 사촌은 어머니 화장대에 관심을 보이며 화장품을 갖고 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립스틱 하나를 뽑아 온 얼굴에 칠하며 신나게 놀았고 립스틱과 화장대는 엉망진창이 됐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놀래서 사촌을 막으려 했으나,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말렸다.

"그냥 내버려 둬."

통제가 안 되는 상황, 그걸 우리 어른의 기준으로 제지했을 때 생길 후폭풍, 엄마의 부재를 다시 깨닫고 울게 될 사촌동생의 감정 상태까지... 그냥 그건 Let them 해버리는 게 결과적으로 나았다. 그래야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립스틱 따위 부러져도 하나 또 사면되고, 엉망이 된 화장대는 나중에 정리하면 된다. 그냥 사촌의 즐거움을 방해하지 않고 우리는 그대로 뒀다. 그리고 각자 할 일을 하러 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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