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가정이었지만 돌아보면, 어쩌면 사랑은 받았던 거 같아.>
사랑받고 큰다는 건,
주로 평온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관심과 애정을 듬뿍 받으며 구김살 없이 커온 것을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하나도 화목하지도 않고 부모 사이도 나쁘지만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도 있다.
가정사가 불안하고 부부가 불화로 서로 싸우고 있어도, 자식을 사랑 없이 키우지는 않았을 거다.
평화롭지 못한 환경 속의 아이는 불안한 정서를 갖고 살아간다. 약간은 삐뚤어진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고 해도 일단 사랑은 받고 큰 거다.
자녀가 원하는 형태의 안정감이 아니었고, 불안으로 가득 찬 가정 속에 있었지만 그래도 사랑 비슷한 감정을 받으며 커왔을지도 모른다. 공포를 견디느라 사랑이라 느낄 틈도 없겠지만.
불행한 가정일지언정 부부는 자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둘은 전쟁을 치르면서 함께했다. 서로를 보면 인상 쓰고 화를 내지만 자녀를 보면 웃어야 하고 때론 화를 참느라 무표정으로 일관했어도 나름 그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 물론 그중에 감정적인 부모는 자녀에게도 분풀이를 할 수도 있겠지만.
자녀는 이렇게 살 바에야 두 분이 갈라서서 정신적 안정을 찾고 싶을 수도 있다. 나는 어릴 때 부모님이 제발 이혼했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했다. 혹은 그 시절 불화의 원인으로 보였던 아버지가 사라지길 기도했다.
나의 매일은 불안으로 시작해서 공포로 끝이 났다.
자라온 환경이 평화롭지 못했으니 구김살 전혀 없는 해맑은 사람이 되지는 못했다.
서로를 저주하는 부모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가정에서 화목을 바라기는 어렵다. 평생 이혼을 하고 싶어 하고 부부가 서로를 경멸해도 자식을 대할 때는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줄 수 있었을 거다. 그렇게 믿고 싶다.
다만 가정환경을 평화롭게 조성해주지 못했을 뿐인데 그 자식은 사랑을 전혀 못 받고 컸다고 볼 수 있을까?
그 아이는 그저 차가운 구석이 좀 많고 시니컬한 어른이 되었다.
다 큰 성인 둘이 만든 가정을 왜 그렇게 불행하게 만들었는지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그들에게 분노스럽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사랑을 받은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한동안 나는 이 사실도 거부하며 살았다.
그들은 서로를 미워했고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으니 나는 사랑도 못 받고 큰 불쌍한 아이라고 과거를 편집했다.
그러나 그들의 불행과 내가 받은 사랑은 사실 다른 문제다.
물론 가정이 화목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거다.
마음은 여유 있고 안정감이 넘쳤을지도 모른다.
부부 사이가 나쁜 가정은 집안 분위기도 살벌하다. 자녀는 매사 눈치를 봐야 하고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늘 불안 속에 있게 된다.
그렇지만 한 명이라도 믿을 부모가 있다면 그 안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다.
비록 두 사람은 행복하지 못했고 집안 분위기도 엉망진창이지만, 그래도 각자 자식 사랑을 실천했을 거다.
부부의 불화합이 전체 가정을 지옥처럼 만들었지만 그런 집에서 컸다고 해서 망할 자식이 되는 건 아니다.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한 게 늘 내 부끄러운 과거였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불행한 성장기는 한 성인에게 편견의 딱지를 붙인다.
결혼 적령기 조건 중에 '행복하게 큰 사람과 결혼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불행한 가정사는 배우자가 되기에 큰 결격 사유가 된다.
경제적으로 부족함은 없었지만, 정서적인 안정감은 전혀 없었다.
불우한 환경이지만 제대로 지원받아 성취를 쌓아왔다고 해도 부모의 사이가 나쁘고, 늘 싸움의 전쟁터에서 살아온 자녀들은 배우자 조건에서 흠이 된다.
그런 가정에서 커온 자녀는 직접 불행을 선택하지 않았다.
태어나보니 그런 환경이었고 살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안에서 커가면서 그 위기들은 스스로 잘 극복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일단 거르고 봐야 하는 존재로 낙인찍힌다.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낸 것도 서러운데 어른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하자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
불행한 가정사는 많은 부분에서 약점이 된다. 그래서 그걸 비밀로 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폭력가정에서 자라온 많은 사람들은 행복한 가정 출신인양 행동할 때가 많다. 겉으로는 멀쩡한 집안이니 나도 유복하고 평화롭게 성장한 모습으로 살아왔다. 굳이 말할 상황도,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행복한 가정이라고 해서 인간에게 결함이 없을까? 불행한 가정 출신이라고 무조건 하자 있는 사람일까?
어떤 환경이었든 사람에게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지금 누군가에게 큰 단점이 있다면 무조건 과거 탓, 부모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환경에 비추어 타인을 판단하는 경향이 많다.
과거의 불행이 나를 잠식시키지 않기 위해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살 수는 없다. 수많은 개조와 스스로 달라지려는 남다른 노력이 요구된다.
겪어온 그대로의 날것으로 산다는 건 과거의 결핍을 그대로 표출하는 삶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곧 불행한 과거가 만들어낸 불행한 현재의 자신이 되는 것이다.
어두운 과거의 오명을 극복하고 싶다면, 더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변화와 행동적인 실천이 필요하다.
나의 모든 실수가 과거의 나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현재의 긍정적 성취가 좋은 일들에서만 기인한 것들이 아닐 것이다.
과거의 나쁜 일들은 나에게 트라우마가 되어 실수를 하게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힘든 상황을 극복해 내면서 오히려 어렵고 괴로운 순간을 담대하게 대할 수 있는 강단을 키워줬다.
결핍을 이겨내면서 오히려 폭발적인 성취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집안 환경이 너무 불운하고 괴롭다 보니 그것을 잊기 위해 현실도피로써 공부에 매진했는데 그 결과가 생각보다 좋았고 좋은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물론 평화로운 환경이었다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을지, 아니면 그냥 안주하느라 별 볼 일 없을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극복하기 위한 실천을 통해 좋은 결실을 만들어냈다.
나쁜 일들을 겪어가며 많은 것들에 대해 막연한 기대와 환상을 품지 않는다. 지금보다 더 어렵고 힘든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 겪는 일들은 비교적 괜찮은 느낌이다.
막연한 기대가 없으니 실망이 없고 많은 것들은 내가 한만큼의 성취를 얻는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그저 차갑도록 합리적인 사람이 되었다.
물론 세상사 내가 한만큼의 보상이 없을 때도 많지만 그 정도야 살아온 고통에 비해 쉽게 극복되는 작은 아쉬움일 뿐이다.
사랑 못 받고 커도 괜찮다.
집안이 엉망진창이어도 괜찮다. 내가 잘못했거나 내 선택이 아니었으니 죄책감에 빠져있을 필요는 없다.
그런 상황 속에 살아왔지만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오늘을 채우고 살면서 과거는 자꾸 뒤로 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부당했던 과거를 발판을 삼아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더욱더 자기 검열을 강화하며 똑바로 서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나갈 수 있다.
과거의 상처 속에 잠식되는 게 아니라, 적극적인 변화와 개선을 통해 오히려 객관성을 갖춘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를 잘 극복하면 타인에게 바람이 적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다.
남들은 나를 사랑 안 해 줄 수 있으니 자신만은 스스로 사랑하며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 내로남불이 아니라 자기에겐 엄격하게 세상에게는 관대한 사고방식을 만들 수도 있다.
사랑받고 커온 사람은 구김살 없고 괜찮다. 아니 너무너무 좋다.
그러나 사랑받지 못한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도 괜찮을 수 있다.
이 슬픈 사람들은 위기의 순간에 힘이 있다.
타인의 관심과 애정을 통해 자기 존재의 가치를 만들어가지 않는다. 스스로가 정한 기준에서 자신을 지키고 행복을 만들어간다.
그러니까 사랑 못 받고 컸다고 자책하거나 기죽을 거 없다.
내가 더 나를 사랑하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노력을 하면서 차라리 혼자서 더 훌륭한 사람이 될 기회가 남아 있다.
과거의 모든 상황이 현재의 나를 규명할 수는 없다.
선한 영향을 받아 좋은 점을 채워가며 성장할 수도 있고, 잔혹한 현실에서도 교훈을 얻고 생존력을 키워올 수 있다.
불편한 과거는 결핍이 가득 찬 오늘을 낳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그런 어려움을 겪었지만 노력으로 극복한 사람은 그래도 꽤 깊이 있고 괜찮은 어른이 된다.
슬픈 현실에서 더 빨리 어른스럽게 될 수밖에 없었던 사려 깊은 사람이 된다.
세상사 내 맘대로 안되고 이미 이 정도 가진 것도 훌륭하다는 안분지족을 알게 된다.
불행한 가정사가 몹시 부끄럽다. 과거형으로 말하고 싶지만 사실 아직도 부끄럽기 때문이다.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쉽게 오픈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게 내 탓도 아니었고 그로 인해 결핍 있는 사람이 된 것만은 아니다.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아픈 과거를 묻고 마음을 다스린다.
세상에 내 맘대로 되는 일들이 많지 않다. 특히 배우자나 자식, 하물며 타인은 말할 것도 없다.
내 손으로 고칠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된다. 다름과 불편을 포용하는 가슴이 넓어졌다.
어린 시절 살아내 온 상황에 비하면 이 정도는 순조로운 거라며 웬만한 건 남들과 비교해 불행에 빠지지 않는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 천국 아닌가?
대수롭지 않게 많은 것을 수월하게 넘어가니 배우자도 이 가정에 대해 만족도가 높다. 무심하다고 할 정도로 자유로운 내 가정은 이 정도면 다 괜찮다는 여유 아닐까.
가장 바닥을 겪으면 그 보다 높은 건 모두 좋아 보이는 법이다. 가정에서 바라는 기대치가 낮다 보니 오히려 많은 순간 자유롭고 만족스럽기만 하다.
불행하지만 않으면 행복한 것이니 내가 만든 가정은 아주 행복한 집이 되었다.
나는 길에서 잘 필요도 없고, 물건과 폭력이 날아다니는 집에 있지도 않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집에서 귀여운 고양이들이 기다리고 있다.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건 간에 과거에 비해 지금은 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