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인미D Mar 14. 2023

15.건강하고 후회 없이 화내고 풀기

<저널테라피_그저 우당탕 분노의 키보드를 두드리며>


 감정을 내보이는 모습이 늘 멋질 수는 없다. 우리는 대체로 겉모습을 멀쩡하게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말을 아끼고 마음에도 없는 말과 행동을 해가며 스스로를 괴롭혀왔던가.


 부당한 일을 겪은 인간의 감정은 다양한 과정으로 변해 가는데 대체로 처음은 분노로 표출된다. 분노 끝에 냉정을 찾으면 이해를 하기도 하고 인정하고 넘어갈 여유를 갖게 된다. 그 뒤를 이어 내가 벗어나거나 달라질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도 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 생각과 행동을 달리 하며, 수많은 내적 갈등과 괴로움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하고 싶은 대로 모두 말하고 행동을 한다면 필히 그 인간은 사회성 부족으로 낙인찍혀 제명당해 버리고 만다.

 아니, 그러면 이 분노를 어떻게 풀고 살라는 말인가? 딱히 풀 방법은 많지 않다. 특히 말실수를 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하게 된다. 그렇기에 그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분노를 입 밖에 편히 표출해서는 안된다. 

 대신 우리에겐 글이 있다.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지만 글은 주워 담을 수 있다."


 가끔 무척 힘든 날, 나는 작가의 서랍에 이상한 글들을 잔뜩 써놓는다. 남에게 도저히 보여줄 수 없는 속 이야기들을 담아낸다. 우리 모두 판도라의 상자가 하나쯤 있으면 미치지 않고도 타인과 마찰할 일 없이 젠틀하게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


 일기 따위가 위로가 되겠어? 

 너무 분노스러운 어떤 날 신들린 듯 글을 써 내려가며 이상하게도 평온함을 느끼던 순간이 있었다. 키보드를 때려 부수듯 두드리는 통쾌함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글로 마음이 치유된다는 게 믿어지지 않겠지만, 너무 괴로운 날은 후회할 짓 하지 말고, 무엇이든 글로 써보기를 추천해 본다. 어차피 글을 안 쓴다고 한들 딱히 풀 방법도 없지 않나?


 글 쓰며 화 푸는 것이 개인적으로 참 도움된다 했더니, 이미 저널테라피라는 글쓰기 치유법이 있었다.

 저널치료에 대한 여러 가지 방법론이 있지만, 나는 한 가지 주제(키워드)를 가지고 다양한 감정으로 들여다본다. 나의 일에 대해서, 내가 겪은 상황에 대해서, 나의 몸과 건강에 대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앞뒤 없이 마구잡이로 쏟아낸다. 이때, 키보드를 아주 세게 두드리는 것이 도움이 된다.(망가진 키보드는 나중에 고치면 되니까.)


 저널(일기)은 나를 미워하는 반성문이 아닌, 이 세상의 상식선에서 하지 못한 말들 위주로 적어낸다. 마치 누군가에게, 혹은 세상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를 한 장 쓴다는 마음이다. 세상 가장 못난 놈의 자세로 아주 못난 말을 써 내려가도 좋다. 스스로 바닥이 될수록 속이 후련해짐을 느낄 것이다.

 이 글을 통해서 나는 갇혀있는 자아가 해방되는 느낌을 갖기도 한다.

 대체로 하고 싶은 말을 많이 참고 사는 소심한 사람이라면 글 쓰기를 통해 얻는 그 통쾌함을 잊지 못할 수도 있다. 이렇게 못난 모습을 자유롭게 내보일 곳이 글 속 외에는 많지가 않다.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써 내려가는 과정을 통해, 내가 느낀 감정을 더 정확하게 바라보며 이해할 수 있다. 막연하고 추상적인 감정의 덩어리를 실체 하는 글들로 정리해 보며, 그 일이 생각보다 별 일이 아니라거나, 누구나 겪는 지나가는 일이라는 받아들이는 여유를 얻기도 한다. 

 영원한 괴로움도 없고 영원한 슬픔도 없다. 행복과 마찬가지로 괴로움도 인생 전체로 보았을 때 그냥 한때 스쳐 지나가는 이벤트 중 하나일 뿐이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것은 분노와 괴로움을 인생전체에서 완전히 제거하기보다, 그 감정을 잘 받아들여서 순조롭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잘 소화시켜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원만히 잘 흘려보내는 정신적 단단함을 원하는 건지도 모른다.


 글쓰기로 마음을 치유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싶지만, 글로써 감정을 가시화한다는 것은 제삼자의 눈으로 느낌을 객관화하게 된다. 우리가 한발 떨어져서 어떤 상황을 보면 생각보다 최악은 아니라는 감정을 갖게 된다. 그렇게 글을 통해 우리 감정과 나의 현실의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실제로 뭐 때문에 지금의 괴로운 감정이 드는지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전까지, 우리는 충분히 현재의 감정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일기)은 교훈적일 필요는 없다. 내 생각을 글로 써 내려가며 인지하지 못핬던 내 감정이나 상황에 대해 객관적으로 정리하며 감정과 상황사이에 거리두리를 한다는 것이 중요 포인트다. 그러고 나면 스스로 상황을 납득하거나 새로운 국면을 향해 용기 내어 움직일 수 있는 약간의 에너지가 생기기도 한다.

 괴로움은 우리를 앞으로 걸어가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자물쇠 같다. '괴로움의 무기력'은 글로써 일부 털어버릴 수 있게 된다. 마치 걱정인형에게 내 걱정을 모두 덜어주고 나는 숙면에 취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나는 글을 통해 용서와 이해를 하고, 때로는 결심을 다지기도 한다. 내 글들은 대체로 가장 못난 나의 감정 자체이다. 저널테라피로서의 글 흐름은 아주 옹졸한 비난이나 한탄이어도 상관없다. 인기와 공감을 얻는 베스트셀러가 목표가 아닌 내 생각을 고스란히 텍스트화해 본다는 시도가 중요하다.


 그렇기에 정제되지 않은 내 분노의 텍스트들은 평생 세상에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내 생각이 성장함에 따라 암흑의 일기를 조금씩 다듬다 보니 성찰 있는 글로 마무리되면서 공개 발행되기도 했다.

 

 말로 담을 수 없이 못난 나의 감정을 써낸 글들은 다시금 같은 문제로 괴로워할 때 혼자 읽어가며 위로를 받기도 한다.

 아무도 공감 못해주는 슬픈 상황 속에 있는 나를, 가장 잘 아는 친구가 속속들이 내가 원하는 말을 찰떡처럼 해준다. 아무리 내가 쓴 글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낯설게 느껴지기 때문에 익숙한 듯 낯선 글에서 공감과 위로를 동시에 느낄 수도 있다. 내가 쓴 글에 스스로 공감하는 모습이 상당히 나르시시즘으로 비치어지기도 하지만 뭐 어떤가? 

 그것이 저널테라피의 최종 목표가 아닐까? 

 답답한 마음을 쏟아 낼 때 치유받고, 세월이 흘러서 내 글에 내가 또 위로받는 상황.


 적어도 테라피적 글쓰기에서는 그 어떤 못난 모습이어도 상관없다. 남들에게 보여줄 글은 아니기 때문에.

그 글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진화되어 간다. 그렇게 나에게도 남에게도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생각과 감정이 정제되어 세상에 나오게 될 수도 있다.


 분노를 꾹꾹 참고 눌러내, 그저 시간이 지나고 어두운 감정 찌꺼기만 남긴 채 수동적으로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과 달리, 저널테라피를 통해 주도적으로 내 감정을 이해하게 되면, 마음을 컨트롤하거나 훨씬 더 나은 방향을 스스로 모색하게 되기도 한다. 

 아닐 때도 있지만 대체로 글쓰기는 마음 다스리기에 꽤 도움이 된다. 


 남에게 이상한 말을 내뱉어봤자 매장당하기 십상이다. 

 그저 고고하게 분노의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이 젠틀하게 사는 법이다.



Ps.

어린 시절 학급 일기를 담당한 적이 있다. (학급일기란 반에서 일어난 대소사와 관련된 하루 일상들을 기록하는 것이다. 글을 재밌게 쓰는 편이라서 여중생들은 그 학급일기를 돌려보며 무척 좋아했다.) 원래는 돌아가며 전체 학생들이 쓰는 건데 아이들이 자꾸 빼먹는 바람에 선생님은 나에게 전담으로 시켰다. 그렇게 반 이름으로 일기를 쓰다 보니 내 이름은 익명으로 기재되었다. 학급 일기도 사심 가득 채워 점점 내 이야기로 변질되었다. 

아무튼 1년이 지나 전교 학급지에 내가 쓴 학급일기 대표 글이 하나 실리게 되었다. 이름대신 1학년 6반으로. 그걸 잊고 있다가 성인이 되어 중학교 학급지를 보고 내가 썼다는 것이 다시 기억이 났다. 본인이 쓴 글은 시간이 지나 읽으면 낯설긴 해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자신만의 주된 생각이나 말투, 글습관은 쉽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만나도 글쓴이는 자기 글을 찾아낼 수 있다.

 혈육은 피가 당긴다라는 말처럼, 자기가 쓴 글에서 뭔가 당김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상하리만치 내 자식 같은 느낌이랄까. 독립하여 오랜만에 간 친정집에서 발견한 학급일지에서 30년 가까이 지난 내 글을 찾는 재미란~


                     

매거진의 이전글 14.외로움의 정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