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적인 권위는 사양합니다.
남편의 주재원 발령으로 마음속 저 구석에서 작게 피어나던 걱정이 있었다. 대부분의 주재원 아내들이 겪는 ‘주재원 와이프 사회’에 관한 것이었다. 남편들의 직급이 와이프의 직급인 것 마냥 그들 간에 서열이 정리되는 주재원 와이프의 세계.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무리 속에서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싫은 사람과도 억지로 관계를 이어나가야 하는 그 세계.
다행히도 이곳은 작은 지사라 한국인이라 봐야 남편과 남편 상사 한 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한국인 사모님이 있다는 사실에 괜한 두려움이 생겨났다. 특히 지방에 제조 기반을 둔 기업들의 그 '사모' 문화를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서울이 아닌 저 아랫지방에서 근무하다 오셨다는 남편 상사 내외분에 대한 걱정이 제법 컸다.
나는 직장 생활을 할 때도 내 의견을 거침없이 얘기하는 편이었다. 그런 일로 상사에게 미움을 사기도 했지만 둥글둥글 튀지 않고 사는 삶이 미덕인 것 마냥 포장되는 한국 문화가 싫었다. 미움받는 것보다 불합리하고 부당한 것을 눈 감아 넘기는 게 더 싫었다. 특히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사람들을 볼 때면 오히려 우습게 보였다. 이런 내게 남편은 네가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났다면 분명히 독립운동을 했을 것 같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었다.
모난 성격 덕에 나는 남편 상사의 아내를 내 상사처럼 모실 생각이 없었다. 남편 상사의 아내라는 이유로 그 사람과의 관계를 갑과 을로 규정짓고 싶지 않았다. 혹시 내가 남편 상사의 아내에게 납작 엎드리지 않아 그 아내가 베갯잇 송사라도 한다면, 그래서 남편에게 인사상 불이익이 생긴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 남편 또한 윗사람에게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거나 정치적인 태도를 취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켜나가는 작은 그릇의 사람이 아니었다. 이 도시의 유일한 한국인 가족이지만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 관계를 억지로 만들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다짐이 무색하게도 이곳에 와서 만난 사모님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거의 스무 살에 가까운 나이 차이에도 나에게 윗사람으로 대접받으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게 꼬박꼬박 사모님이라는 존칭을 써주며 말 한마디 한마디 품위를 잃지 않는 멋진 어른이었다. 해맑은 문학소녀 같으면서도 현명하고 단단한 멋진 여성이었다.
가끔 다른 시대를 살아온 어쩔 수 없는 세대 차이가 느껴질 때면 우리는 서로의 가치관에 대해 경청하고 이해하려고 애썼다. 때로는 너무 다른 생각에 서로를 신기해하고 재밌어하기도 했다. 영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사모님은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고 내 의견을 이야기했고 사모님은 내 의견을 존중해 줬다.
그런 그녀가 좋았다.
하지만 뭐든 급하게 쌓아 올린 것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니 섣불리 관계를 쌓고 싶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급히 쌓아 올린 관계로 나중에 내가 상처받을까 봐 두려웠다. 친절하고 나와 가까워지려고 애쓰는 사모님의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천천히 관계를 쌓아가고 싶었다.
간혹 내가 만나고 싶지 않을 때 만나자는 연락이 오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 않고 그냥 오늘은 혼자 있고 싶다고 솔직하게 얘기하고 정중히 거절했다. 그런 내게 자존심 상해하거나 네가 감히?라는 식의 반응이 아닌 나를 존중해 주는 사모님의 모습에 존경심이 생겨났다.
진심으로 존경심이 생겨나니 나도 천천히 마음을 열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가까워졌지만 절대 선을 넘지 않았다. 서로의 생활에 깊숙이 들어가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서로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지도 않았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갔다.
지금은 한국으로 귀국한 사모님과 여전히 가끔 통화하며 수다를 떠는 관계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서로를 존중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덕인 것 같다.
‘권위’와 ‘권위적인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권위는 사람들을 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이고, 권위적인 것은 강압적으로 자신의 뜻을 따르게 하는 태도로 상대에 대한 존중이 빠져있다.
사모님은 권위적인 사람이 아니라 윗사람으로 존경하게 만드는 여유로운 권위를 갖고 있었다.
비단 주재원 와이프들의 관계만이 아니라 부모, 형제, 직장 동료 등 모든 인간관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열쇠는 ‘존중’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