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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밤 Mar 22. 2024

시어머니의 사진첩을 보았다

그 안에는 사랑이 있었네

오랜만에 노트북 탐색기를 살펴보다 '엄마 SD카드'라는 폴더를 발견했다.

5년 전쯤, 남편이 시어머니 휴대폰 저장공간을 늘려드리겠다며 SD카드에 있던 사진을 노트북에 옮겼었는데 그게 아직 남아있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의 사진첩을 본다는 게 사생활을 훔쳐보는 것 같은 묘한 죄책감이 밀려왔지만 궁금함에 사진첩을 열어보았다.

사진첩에는 시어머니의 시선으로 바라본 수년간의 세상이 담겨 있었고, 사진 한 장 한 장에서 어머님의 마음이 느껴졌다.


돌아가신 시외할머님과 찍은 사진, 수많은 꽃과 풀 사진, 아버님과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내 아이의 사진.

지금은 하늘에 계신 시외할머님과 찍은 사진은 하나같이 여행지에서 멋진 경치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이었다. 연로한 시외할머님을 모시고 어머님과 이모님들이 여기저기 여행 다니며 남겨놓은 그 사진에는 친정엄마에게 좋은 거 더 많이 보여드리고, 좋은 음식 더 많이 맛보게 해드리고 싶은 딸내미 마음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발견한 종이접기 사진.

첫 손주인 내 아이의 돌보미를 자처하신 우리 어머님.

손주가 생기기도 전부터 손주는 당신이 직접 돌보고 싶으셨다는 어머님께서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하는 나를 대신해 아이를 돌봐주기로 하셨다.

그리고 내가 복직하기 전, 학구파 우리 어머님은 베이비시터 자격증을 따셨다.

그 자격증 과정에서 배운 종이접기 사진이 남아 있었고 기대 반, 긴장 반 시터 과정을 배우셨을 어머님의 마음이 느껴졌다.


사진첩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꽃과 풀 사진들은 '이다음에 우리 손주한테 들꽃 이름 알려줘야지' 하시며 찍은 사진들이었다. 산에서 들에서 꽃을 발견하면 사진을 찍고 컴퓨터로 들꽃 목록을 검색해서 꽃의 이름을 알아내셨다. 그리곤 그 꽃의 이름을 달달 외우셨다.

실제로 어머님이 아이를 돌봐주신 동안 아이는 나보다 훨씬 많은 꽃과 풀이름을 알고 있었다.


내가 회사에 있는 동안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들과 동영상에는 다른 세상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를 보며 활짝 웃는 아이 모습도, 소녀같이 노래 부르며 아이와 춤추는 어머님의 모습도. 내가 모르는 이들만의 세상이 있었던 것이다. 내 사진첩만큼이나 넘쳐나는 아이의 사진을 보며 '그래, 나 못지않게 우리 아이를 정말 사랑하셨구나...'싶은 마음이 들었다.


수많은 사진을 하나하나 보며 어머님이 느꼈을 그 마음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어머님의 사진첩 안에는 사랑이 있었다.

해외에 살고 있는 아들 내외가 연락도 자주 안 하고, 손주 사진도 잘 보내주지 않지만 싫은 내색 없이 그저 기다려주시는 우리 시부모님께 새삼 감사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당신 아들만 귀하게 대접하는 시어머니가 가끔 밉기도 했고 그래서 마음이 서서히 닫혀가는 것만 같았는데, 그런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드는 것 같았다.

내일은 어머님께 전화 한 통 드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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