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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창 Aug 04. 2020

행복해지기 힘든 시대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요가를 하다 보면 숨이 막히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곧잘 마주한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한다.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포기하고 자세를 풀고 싶은 그때 선생님은 말한다. “호흡에 집중하세요” 난 속으로 말한다. “숨이 안 쉬어지는데 어떻게 집중합니까!” 그렇게 속으로 씩씩거리다가 속는 셈 치고 호흡에 한번 집중해본다. 그렇게 숨을 쥐어 짜내며 호흡에 집중하면 고요함 속에서 몸의 고통이 조금은 잊힌다. 없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조금 잊혀진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것도 집중력이 필요하기에 조금만 딴생각이 들거나 몸의 고통에 의식을 기울이면, 잊혔던 고통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참지 못하고 자세를 풀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모든 수련의 마지막인 ‘사바아사나’ 온몸의 힘을 풀고 쉬어가는 순간이다. 송장처럼 누워서 온몸의 힘을 빼고 호흡에 집중한다. 가끔 너무 고된 수련을 했을 때면 가수면 상태에 접어들어 잠이 들 뻔하기도 한다. 하지만 호흡에 제대로 집중하면 마치 우주에 붕 떠있는 느낌이 들면서, 솜 같이 부드러운 것들에 폭 싸여있는 듯한 포근함을 느낄 수 있다. 행복이 느낌이라면 이런 것일까? 하고 순간을 만끽한다.



"일상에서도 이런 포근한 느낌을 지닌 채 세상을 살 수 있다면 삶이 조금은 행복해지지 않을까?"


‘굳이 고된 동작을 하지 않더라도 일상 속에서 호흡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는 그런 포근한 느낌을 지닌 채로 살 수 있지 않을까?’ 갑자기 든 생각에, 내일 하루는 호흡에 온전히 집중하면서 살아 보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적은 수첩을 확인하고, 어떻게 할지 생각하면서 면도를 하고 커피를 타고 씻었다. 그리고 옷을 입고 가방과 커피를 챙겨 차에 탔다. 그때 생각이 들었다. ‘어? 나 오늘 호흡에 집중해보기로 했었지?’ 그제야 운전대를 잡으며 호흡에 집중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한 생각이 자꾸 치고 올라왔다. 또 일하러 가서는 주고받는 업무부터, 계획하고 실행하는 업무까지, 호흡에 신경 쓰다가는 “오늘 왜 그래?”라는 말을 듣기 딱 좋았다. 그래서 난 겨우 반나절 만에 포기해버렸다.


틱낫한 스님은 호흡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고뇌를 물리칠 수 있다고 했고 행복은 ‘지금 이 순간’에 있다며 '지금'을 위한 걷기, 먹기, 쉼의 명상법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 같은 평범한 직장인들은 일하는 중에는 끊임없이 소통하고 고민해야 하고, 퇴근 후에는 고민할 것들은 수첩에 적어서 내일로 미룬 다음에야 생각과 고민의 고리를 끊어버릴 수 있다. 그렇게 얻을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많으면 4-5시간? 게다가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 상실된 사회


언제부터 인가 사회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지금’에 집중하며 사는 삶이란 어려운 일이 되었다. 사회는 끊임없는 생각과 자기 계발을 강요했고, 우리는 반성과 개발의 목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과거의 자극적인 기억이나, 미래의 고민에 양보하는 일이 잦아졌다. 직장에서도 다양한 업무를 잘해야만 ‘똘똘한 녀석이다’라는 평을 들을 수 있는 만큼,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더 적극적으로 '현재'를 미래와 과거에 양보하며 살고 있다. 게다가 기술의 발전으로 핸드폰, 노트북이 생기며 언제 어디서든 일을 할 수 있고, 누군가의 연락을 받을 수 있기에 맺고 끊음은 사라졌다. 그렇기에 자극 없는 고요한 시간은 내가 억지로 만들어야만 하는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을 살면서 세상의 풍요가 눈에 들어왔다"


짧게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간 적이 있었다. 당시 만다린 과수원에서 일하며 ‘만다린’이란 오렌지 비슷한 녀석을 아침 8시부터 오후 4-5시까지 땄었다. 같이 움직이고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농장에 있었고, 마침 핸드폰의 노래도 질렸기에 난 그냥 맨몸으로 훌훌 농장으로 갔고, 나무에서 보이는 만다린을 따고 때 되면 밥을 먹고, 그런 단순한 생활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고된 일로 힘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차 몸이 가벼워지고, 설명하기 힘들지만 삶의 질이 올라갔다고 해야 하나? 순간이 짧게 느껴지고, 포근한 마음으로 일상을 온전히 느끼기 시작했다. 그날의 날씨, 나무를 타는 내 몸, 달달하고 시큼한 만다린의 맛, 뜨거운 햇빛, 나무의 생기, 그러면서 당시 나의 젊음까지 온전히 느꼈고 세상을 만끽했다. 당시의 나는 단순작업을 반복하면서, 그 누구의 압박과 스트레스도 받지 않았다(딴 만큼 돈을 받기에 압박이 없었다), 근심 고민을 하지 않았고, ‘지금’을 미래의 고민에, 과거의 기억에 빼앗기지 않은 채, 온전히 순간에 집중하며 명상 상태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풍요로운 시간이었다. 




"원주민들은 현명하기에 문명을 거부한 것은 아닐까?"


인간이 살기에 가장 척박하다고 여겨지는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부시맨’들은 문명을 거부한 채, 수렵과 채집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단순히 생각하면 헐벗고 굶주린 이들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은 하루 몇 시간만의 짧은 노동으로 생계를 해결하고, 남는 많은 시간들을 여가시간으로 보낸다고 한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연구한 인류학 박사 ‘리처드 리’는 그들의 생활을 ‘풍요로워 보인다’라고 평했다. 그 외에도 호주의 참사랑 부족, 아메리카, 멕시코의 소수 인디언 등 오래전부터 자연과 함께 살아온 그들은 문명 없이도 행복해 보였다. (물론 우리가 그들의 자리를 빼앗기 전에는 더 행복했겠지만)


우리는 문명의 발달로 편리함을 얻었을지는 모르지만 풍요로움에서는 멀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행복에서는 조금 더 멀어진 것은 아닐까 





에필로그


다시 한번 호흡에 집중하며 사는 것을 시도해보았다. 이번에는 시간을 정했다. 퇴근 후 30분 안에 모든 내일의 일거리와 고민거리들을 수첩에 적어서 봉인해 두었다. 그리곤 아침에 직장에 도착해서 그 봉인을 푸는 것이다. 그렇게 며칠 동안 저녁시간과 아침 출근 1시간을 할애해 시도해 보았다.


우선 안 좋은 점은 멍해 보인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멍해 보인다는 소리를 들었고 “무슨 일 있냐?”는 말도 들어봤다. 직장에서 원하는 이미지는 아닌 듯하다. 스위치를 켜고 끄듯,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 반면에 좋은 점은 아주 많았다. 


우선 전반적인 삶의 질이 올라간다. 몸에 불필요한 힘이 빠지면서 목과 어깨가 부드러워졌고, 몸이 전반적으로 편안해졌다. 게다가 세상을 조금 더 다채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하루는 차를 타고 출근하려는데 비가 쏟아졌다. 그런데 그날따라 빗소리가 따듯했고, 비가 오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날 아침은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또 하나는 음악이 새롭게 들린다는 것이다. 차 안에서 듣던 음악은 몇십몇 백 번은 들어본 음악이고 마치 배경음악 같았다. 질려버린 것이다. 하지만 질릴 정도로 들었던 음악에 가사가 들리기 시작하며, 처음 들었던 그때로 돌아갔다. 배경음악이 추억이 담긴 진짜 음악이 된 것이다. 비트가 빠른 음악은 비트가 온몸을 관통하듯 저릿저릿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다음날이 공휴일이면, 술 약속을 잡거나, 집에서 재미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술을 먹기 마련인데, 가만 누워서 책을 보며 재미를 느끼는 등 작은 자극에도 만족할 수 있게 되었다. 


요약

일상에서 호흡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면, 세상을 다채롭게 느낄 수 있고 전반적인 삶의 질이 올라간다. 다만 직장에서는 ‘너 무슨 일 있냐’라는 말을 들을 수 있으니, 스위치를 잘 끄고 켜야 한다. 



사진출처

https://wonderfulmind.co.kr/awaken-abundance-within/

http://blog.daum.net/thanksbuddha/891

필자 개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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