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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창 Feb 23. 2021

이상주의자의 현실적응기 3 가난이란 이름의 스승

이상주의자의 현실적응기 3 가난이란 이름의 스승

해외여행을 떠나는 이들에게 딱 한마디를 해줄 수 있다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 


“가난하게 여행하라. 그러면 그곳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치안이 안 좋은 곳에서는 조심할 것들이 많겠지만, 그곳을 제대로 느끼고 싶은 여행자라면 호텔과 택시에 갇혀 있기보다는, 저렴한 숙소를 찾아다니며 현지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추천한다. 그렇게 그곳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길을 물어 찾아가는 과정 전체를 여행으로 삼는다면, 돌아올 때 몸과 마음 가득 그곳의 선물들이 들어차서 진한 냄새를 풍기며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돈도 많이 아낄 수 있다. 그 돈으로 계획보다 더 오래, 더 많은 곳을 가볼 수도 있을 것이다. 


수없이 여행을 떠났던 어느 지구별 여행자는 말했다. “여행지는 쉽게 본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여러 번 오고, 계속 부딪히는 사람만이 그곳의 진짜 모습 볼 수 있다.”



여행지에서 만난 한 사람은 차분한 눈빛으로 필서를 하고 있었다. 그는 어제저녁 내게 브런치에 글을 쓴다고 말한 사람이었다. 그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했고, 깊은 존경심을 보였다. 방금 전까지 하루키를 “그 할아버지”라 칭했던 것에 눈치를 보며 뒤늦게라도 하루키에 대해 존경이 있음을 표해야 했다. 그게 그와 대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 같았다. 나처럼 취미로 글을 쓰는 사람을 처음 만나서 일까? 이상하게 그와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몸과 시선은 하루키의 책을 필서 하던 그대로였다. 할 말 있으면 얼른 하고 가라는 듯...... 하지만 눈치 없는 척 말을 걸어대며 자연스레 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내 그의 시선과 몸통은 나를 향했고 내 이야기에 몰입한 듯 보였다. 그렇게 한껏 내 삶에 관심을 보이며 듣던 중 그는 나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가난을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어?” 잘은 모르지만, 안정적인 가정에서 큰 사건 사고 없이 살아온 것 같아 보이는 그가 한 말에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에도 잘 살았다고 칭찬해준 느낌이랄까? 힘든 시절을 잘 이겨냈다고 인정해준 느낌이랄까? 그렇게 난 이상한 부분에서 인정을 느끼며 내 삶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가난이라는 훈장을 다시금 되새겨 보게 되었다. 




난 태생적으로 나태했다. 겁도 많고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끈기도 없었다. 공부도 항상 처음에만 열심히 했고, 끝까지 열심히 한 것은 고3 때가 유일했다. 게임조차 3달 이상 한 적이 없을 정도로 금방 질려했고, 툭하면 누워서 공상을 하곤 했다. 그런 내가, 가난이 준 선물에 힘입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들을 해 나가며, 상대성의 행복을 알게 되었다. 어둠이 있기에 빛을 알 수 있는 것처럼 고생하고 힘들어봤기에 편함과 만족을 알게 되었다. 세상의 다양한 면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가난은 나에게 마치 스승과 같았다. 가난이 던져준 어쩔 수 없는 일들을 해내면서, 그때마다 그것들은 보상으로 지혜를 던져줬다. 부유해서 내 의지대로 살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들을 했고, 못 만날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내 세상은 풍성해지고 있었다.  


가끔 이런 생각마저 든다. 만일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 이번 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 계획했다면, 본래의 ‘나’라는 놈은 지금의 ‘나’에게 이번 생을 제대로 느끼도록 하기 위해 실컷 고생을 시켰을 것이다. 많은 곳을 가보고, 많은 사람을 만나며 세상을 한가득 담아갈 수 있도록......., 그렇다면 나태한 나에게 가난은 필수요소다. 가난해야만 움직이고, 안 가볼 곳을 가보고, 안 만날 사람들을 만날 것이기 때문에……, 마치 가난하게 해외여행을 떠나서 그곳을 깊이 느껴보고 가득 채워 돌아오는 것처럼……. 




초등학교 2학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당시 학교에서 가슴에 달고 다니는 이름표를 단체로 주문받아 나눠주기도 했다. (1997년) 개당 비용은 600원, 선생님께서 이름표를 주문할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을 때, 난 이름표가 없었음에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 어린 나이에 우리 집은 가난하다는 인식이 있어서, 600원도 집에 부담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날 저녁 엄마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구구절절 말하던 중 이름표가 없어 교문에서 잡혔다고 했다. 그러자 엄마는 그런데 왜 이름표를 주문 안 했냐고 물었다.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우리 집 가난하잖아……” 엄마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웃으며 말했다. “그건 맞는데, 600원 없지는 않으니깐 내일 가서 주문되나 물어보고 주문해~ 안 그러면 문방구에서 돈 주고 사던지~” 난 신나서 알겠다고 했다. 


우리 집은 아빠에 따라 돈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아빠는 인테리어나 건축업을 어깨너머로 배웠고, 잘 못하지만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 했다. 그렇게 몇 번의 사무실을 차리고, 접는 것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하는 듯 보였으나, 그 마음은 1달이 채 가지 않았다. 사무실을 비우고 도박을 하러 가기에 바빴고, 엄마는 그런 아빠의 경제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직장을 다니며 육아까지 도맡아 했다. 부모님은 돈 때문에 싸우는 일이 잦았고, 그러면서 ‘우리 집은 가난하다’는 인식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대학생이 되며 자연스레 돈을 벌었다. 엄마 혼자 고생하며 돈을 벌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난 그 돈을 받을 수 없었다. 옷가게, 식당, 콜센터, 해외전시, 카드사, 과외, 막노동, 독서실, 고시원, 사무원, 호텔 직원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난이 준 당시 고생이자 훗날 선물을 하나하나 받기 시작했다. 


나의 첫 아르바이트는 식당 일이었다. 그곳에서 ‘인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작은 갈빗집이었는데, 눌어붙은 불판을 뜨거운 물에 불려 닦고, 서빙을 하는 등 잡일을 했다. 식당 주인아주머니께서 어머니뻘이라 그런지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일부러 불판 닦기처럼 힘쓰는 일을 내가 더 하려 했고, 빨리빨리 일해서 아주머니가 힘든 일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자 무뚝뚝했던 아주머니는 툭하면 내가 좋아했던 비빔냉면을 말아 주셨고, 천천히 하라며 따뜻한 말과 함께 주급도 올려 주셨다. 그냥 엄마 같아서, 어린 내가 조금 더 고생하는 게 맞다는 생각으로 일 했을 뿐인데 ‘인정’이란 것을 받았다. 그곳에서 마음을 쓰고 열심히 하면 누구에게나 인정을 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카드사에서는 나이만 든다고 어른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앞으로의 삶에 대한 많은 고민과 배움을 준 일이었다. 카드 영업은 시간이 자유로워 대학 수업과 병행할 수 있었고, 실적만 좋다면 수입도 꾀나 괜찮은 아르바이트였다. 다만 수많은 거절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고, 수시로 연락을 받아야 하기에 장시간 집중하며 공부를 하기엔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다. 당시 20대부터 80세까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어른들을 하루에도 100명 이상 만나며 대화를 해야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사람에 대해, 또 좋은 어른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나이는 많았지만 욕심 가득한 아이 같던 어른, 단단한 나무 같은 우직한 어른, 양심을 어기며 괴물이 된 어른 등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난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까?’라는 무거운 질문이 마음속에 자리하게 되었다.


막노동에서는 아끼고 살아야 함을 배웠다. 신축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화장실 방수작업을 했는데, 하루 종일 무거운 시멘트를 나르며 방수작업을 하고 집에 돌아온 날은, 전기에 감전된 듯 옴짝달싹 하지 못했다. 누워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반면에 좋은 점이 하나 있었는데, 고질적인 불면증이 싹 사라졌다는 것이다. 눈을 감고 1시간, 2시간이 지나도 잠을 못 이루는 날이 부지기수였지만, 일을 시작하고는 눕자마자 기절하듯 잠들 수 있었다. 또한 잠드는 시간도 무척이나 빨라졌다. 저녁 8시, 늦어도 10시 전에 잠을 자곤 했다. 그렇게 잠을 자지 않으면 다음날 새벽, 출근을 하기 위해 눈 뜨는 것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특히 겨울에는 일하는 것이 배로 힘들었다. 추운 겨울 새벽 녹슨 기계를 겨우 돌리는 것 마냥 힘겹게 몸을 일으켜 죽어도 가기 싫은 일터로 꾸역꾸역 나가며 ‘평소에 아껴야 만이,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몸에 밴 절약정신은 막노동 이후에 온 것이다. 그만큼 다신 하고 싶은 않은 힘들고 끔찍한 경험이었다.


고시원에서는 두려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잘 모르고 갔던 그곳은 서울에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내가 겪은 세상의 끝이었다. 그곳에서 총무로 일하며 범죄자, 폭력성향의 정신이상자 등 난생처음 보는 부류의 사람들을 대하게 되었다. 경찰이 인근에 사건이 있었다며 조사하러 오는 일이 빈번했고, 눈을 잘못 마주치면 욕설이 날아오기도 했다. 그분들 중 대부분은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주민등록이 말소된 채 하루를 벌어 일주일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중에는 서울 유명대학을 졸업하고 실제로 동창회 초청 카탈로그까지 보여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절대 원래부터 남달랐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평범했지만, 누구나 있을법한 몇 번의 실패가 이어져 지금의 생활까지 하게 된 것이라 했다. 그 이후로는 중요한 선택을 할 때 절대 기분대로 내지르지 않으며, 현재 내가 가진 것들에 감사해하며 신중한 선택을 해오고 있다. 


그 외에도 가난은 많은 선물을 던져줬다. 

선물의 포장지를 뜯는 순간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지만, 그 속엔 지혜가 있었고 만족이 있었다. 그렇게 난 여러 선물들에 힘입어, 이번 세상을 실컷 여행하는 중이다. 나중에 온몸 가득 냄새를 풍기며 후회 없이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도록.









에필로그





카드사에서 배운 양심  X  양심이란 계획된 삶의 가이드라인 




“진창아, 그냥 모른 척하면 되잖아.”

“형 그래도 아는데 어떻게 모른척해요…… 그건 거짓말이잖아요”

“말 안 하는 게 왜 거짓말이야? 네가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르고, 넌 그냥 아무 말도 안 한 건데?”

“알면서 말 안 하는 건 거짓말이죠……”


아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을 거짓말이라 생각했는데, 타인에게 아는 것을 들키지 않으면, 또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거짓말이 아니라 말하며 너무나 태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사람을 보며, 거짓말이란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졌던 날이 있었다. 거짓말에는 양심을 포함시키면 안 되는 걸까? 


처음에는 잘 몰랐었다. 그냥 법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활용하여 돈을 많이 벌면 그게 똑똑한 것이고, 잘 사는 것인 줄 알았다. 또 그것이 자본주의의 당연한 이치인 줄 알았다. 처음 카드사에서 영업을 알려준 형은 화려한 생활과 돈을 보여주며 너도 이렇게 살 수 있다고 했고, 난 그 돈이 너무 갖고 싶었다. 그렇게 한동안 따라다니며 영업을 배우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며 잘 적응했고, 실적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공허를 크게 느낀 날이었다. 


당시 시급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그만큼 많은 거절과 노력이 있었기에, 이 정도 보상은 당연하다 생각했다. 심지어 가난하게 살아온 내가 뒤늦게 사회로부터 받은 기회이자 보상이라고까지 여겼다. 그 주는 실적이 참 좋았다. 다음 주는 학교만 가도 될 정도였다. 한 달 치 일을 이주일만에 끝내고 기쁜 마음으로 주말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공허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이상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과장해서 말하면 내가 살아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그날은 유독 심했는데 내 몸 어딘가로 바람이 숭숭 새 나가는 듯 허전함이 심해 시릴 정도였다. 이 허전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 정도로 벌고 살아간다면,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날 수 도 있을 것 같은데……. 커다란 뭔가를 잃어버리고 사는 느낌이었다. 


“뭘 잃어버린 것일까?”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문뜩 떠오른 한 장면


그날 백화점에서 처음 본 20대 초반의 고객은, 지난번에 카드를 만들었다가 너무 많이 써서 신용불량자가 될 뻔했다고 말하며 겁이 나서 결국 해지했다고 했다. 하지만 날 만난 김에 다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감사해하며 발급해드려야 했다. 한 분 한 분의 고객이 아쉬웠고, 게다가 이렇게 많이 쓰는 고객은 발급 수수료 또한 높았기에 귀한 고객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렇게 절대 해서는 안될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면 조금 고민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 말끝에 고객은 진짜 고민을 했고, 이내 생각해보겠다며 돌아갔다. 뭔가에 홀린 듯이 말했던 그날은, 하루 종일 돌아다녔음에도 하나의 실적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뿌듯했다. 사무실에 돌아와 직원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니, 다들 어이없어하며 멍청하다고 했다. 심지어 거기가 어딘지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멍청하단 소리를 들었지만, 난 그때 알았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양심이었음을…… 


‘가난’이라는 것에 피해의식을 느끼며 나에게 과한 특권을 부여했었다. '난 힘들게 살았으니 그래도 되', '법만 지키면 문제 될 것 없어', '다들 그렇게 살잖아' 하필 카드사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처럼 힘들게 살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대다수는 법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또 들키지만 않으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돈을 많이 벌면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돈 버는 것만 보고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는 그렇게 돈만을 쫓아서 졸부가 되었지만, 외로움과 불행을 토로하는 한 어른이 있었다. 그 어른은 고객으로 만났지만 이야기를 잘 들어주자 툭하면 나에게 하소연을 했다. 매번 똑같은 이야기였다. 그의 삶을 이해해주길 바랬다. "그때는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 시절에는 다 그랬다." 본인이 돈 만을 쫓아 양심을 어겼던 수많은 순간들을 고백하며, 이해받고 용서받길 바랬다. 그럼에도 관성처럼 또 똑같은 선택만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난 그런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된 후에는 내 마음이 제대로 보였다. 돈과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 양심까지 어기게 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안개 같던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래 열심히 살면 어떻게든 될 거야’ 라며 양심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이후 양심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영업을 했고 자연스레 실적은 떨어졌다. 하지만 더 이상 허무함은 나를 잠식해 오지 않았고, 하루하루 공치는 날은 많아졌지만 돌아올 때의 마음은 그 어떤 때보다 선명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이후로는 그곳에서 배운 대로 선명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시 모호해져서 내가 나임을 의심하는 순간이 없도록......


양심을 처음 어겼을 때, 양심은 우리에게 모호한 두려움과 허무함으로 경고를 한다. ‘이렇게 살면 안 돼 이 녀석아!!!!’ 하지만, 그걸 인식하지 못한 채,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한 채, 남들은 다 그렇게 산다며, 또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며 합리화하고 무시한다면 결국 양심은 말하기를 멈출 것이다. 그땐 돌이키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사는 것이 허무할 때, 무언가를 놓치고 사는 것 같을 때는 의심해 봐야 한다. 내가 양심이 하는 말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양심이란 내 의지와 다르며,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본연의 것 중 하나다. 이 양심이란 것은 태어나기 전 본래의 내가 이번 생을 계획하며, 살면서 지켜야 할 것들을 적어놓은 '이번 생의 가이드라인'은 아닐까? 










사진출처

https://www.seogwip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1102

https://www.huffingtonpost.kr/hayoung-lim/story_b_15912400.html

https://www.huffingtonpost.kr/hayoung-lim/story_b_159124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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