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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창 Jun 23. 2020

아빠는 그래도 되는 사람인 줄 알았다

아빠와 태닝

 오늘은 그를 만나러 가는 날이다. 일 년에 한 번 의무처럼 그를 만나고, 밥을 먹으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날, 후다닥 밥을 먹고 적당히 문제없이 사는지 확인한 후 얼른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라는 그런 날이었다.


 그가 일하는 공장에 도착하니 그는 나에게 웃으며 굳이 공장 안으로 들어오라 했다. 그곳은 불을 써서 금형을 만드는 공장으로 7월의 뜨거운 날씨에 공장 내부는 그야말로 불지옥과 같았다. 그는 어린아이가 ‘나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었어!’라고 자랑하려는 듯 갑자기 불 옆으로 가서 금형을 잡더니 이리저리 구우며 모양을 만들어냈다. 나에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이 일하는 외국인들과, 아주머니들께 서울에서 일하는 아들이라며 굳이 일일이 인사를 시켰고,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나서야 밥을 먹으러 갈 수 있었다. 어두운 공장에서 밖으로 나오니 아빠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꾀죄죄했고, 얼굴에는 주름이 깊게 파여 있었다.


 불에 타지 않기 위해 입었던 긴 옷들을 벗어버리고 나니 온몸이 까만 것이 눈에 띄었다. 얼굴, 팔, 목 전부 마치 탄 것 마냥 검게 그을린 모습이 안쓰러웠다. 계속 보면 안쓰러울 것 같아 일부러 외면했다. 왜 그렇게 까만 거냐고 묻지 않았다.

  그날 난 마침 태닝샵을 예약해서 가는 날이었다. 퇴근 후 운동을 할 때 몸만 흰 것이 싫어서 주기적으로 받고 있었다. 얼른 이 의무를 다하고 올라가서 태닝을 하고, 운동도 즐기며, 출근을 준비하는 그런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탄 것 마냥 검게 그을린 아빠의 모습에 편히 돈 벌고, 여유를 즐기는 지금의 내 모습이 비교되며 ‘아빠한테 이래도 될까?’라는 의문이 처음으로 들었다.


“아빠는 이래도 되는 사람이었다.”

 내 아빠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대화를 간간이 하지만, 어릴 적 아빠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적은 없었다. 아빠에게 무엇을 물어보면 말없이 쳐다보거나, 텔레비전, 신문 등을 보는데 집중하며 외면하거나, 가끔 버럭 소리를 치는 등의 권위로 똘똘 뭉친 짧은 반응만이 돌아왔다. 내킬 때나 기분이 좋을 때는 말을 했지만, 일방적인 감정 표현이었다. 나중에는 대화를 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엄마를 통해 소통했다. 아빠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60살이 가까운 지금까지 경제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고, 젊은 시절부터 도박을 시작해서 엄마에게 이혼을 당한 몇 년 전까지도 도박을 했다. 사업을 한다며 일을 벌였지만, 노력하지 않는 일은 잘 될 리가 만무했고, 엄마 혼자서 가족의 생계와 육아 등 모든 것을 책임지며 세상의 풍파를 막아냈다. 아빠는 그런 엄마에게 돈을 요구하며 소리치는 일이 잦았다. 참 못난 아빠였다. 엄마 혼자 울며 세상의 풍파에서 우리를 지켜주려 했고, 누나와 나는 제발 그런 엄마가 쓰러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 가정 속에서 나는 아빠처럼 살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어른이 되었다.


 아빠가 도움이 된 적도 있었다. 사회에 단신으로 나온 내가 힘든 일, 창피한 일을 겪으며 포기하고 싶을 때, 아빠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아빠라면 이럴 때 당연히 포기했겠지? 난 절대 그렇게 살 수 없어!’ 라며 힘들게 몸을 일으켜 세웠고, 지금 사회에서 나름 괜찮게 자리 잡은 거름이 되었다.


 현재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내가 아빠와 연락을 하고 지내며, 요즘 간간이 밥도 먹으러 간다. 누나가 있지만, 누나는 어릴 적 상처가 커서인지, 안쓰러움인지, 미움인지, 두려움인지, 뻘쭘함인지, 창피함인지 전부 다인지 모르겠지만 밉다며 절대 아빠를 보려 하지 않는다. 나도 아빠를 정말 미워했었다. 아니 사실 지금도 충분히 밉다. 누군가가 나이를 먹으면 아버지를 이해한다고 했던가? 나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하필…


“왜 내 아빠는 하필 그 흔하고 평범한 아버지도 되지 못했을까? “

 성인이 되어 대학을 다니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했고, 아버지뻘의 어른들을 많이 만났다. 그중에 좋은 남자 어른들을 아버지의 자리에 대입해보며 ‘저런 사람이 아버지였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심심치 않게 했다.

 어릴 적 아버지라는 지위를 가진 사람은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든 권위를 누릴 수 있고, 호통칠 수 있고, 내킬 때 밖으로 나다닐 수 있고, 그럼에도 가족은 모두 그를 최고 어른으로 대우해야 하는 지위… 돌아오지 않아도 항상 그의 밥그릇은 준비되어있는 자리……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알게 된 아버지라는 자리는 그런 이기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라는 영화를, 아버지의 애환과 희생을 담은 드라마를,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 또는 연인들에게서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분노했다.


‘왜 나의 아빠는 이런 평범한 아버지조차 되지 못했을까? 세상에 이렇게 수많은 아버지들이 있는데 왜! 좋은 아버지까지 바라지도 않았는데…… 그냥 평범한 아버지조차 되어주지 못했을까….’



 그래도 아빠이기에 “가족 중에 한 명정도는 생사를 알아야 한다”는 엄마의 부탁으로 처음 연락했지만, 이제는 이런 만남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아빠는 이혼 후 처음으로 세상의 밑바닥을 맛봤다. 더 이상 기대고 쥐어짜 낼 곳이 없어졌기에 당장 일을 해야 했고, 이런저런 일을 해보며 처음으로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처음에는 쓰레기차를 몰았고, 공공근로를 했고, 공장도 몇 번이나 옮겼다. 아빠는 성격이 불 같아서 조금이라도 싫거나 불편함을 느끼면 불같이 화를 내고 욕을 하기도 한다. 입에서 큰소리가 나오기 전 뚫어져라 보는 눈빛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기가 꺾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눈빛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당장의 생계였다. 아빠는 60살이 되어서야 누군가의 눈치라는 것을 처음 보게 되었고, 참는 것 또한 배우게 되었다. 늦은 나이지만 드디어 ‘리얼월드’에 오게 된 것이다.  


“아빠한테는 아빠가 없었으니 이해를 해줘야 할까?”

 아빠는 아빠가 없었다. 부잣집 3대 독자 도련님으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는 아빠를 낳고 폐병으로 일찍 돌아가셔서 아빠는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과거 동네에서 유명한 부잣집이었던 만큼 주인어른이 없어진 이후 재산을 노리는 수많이 이들이 호시탐탐 찾아왔다고 한다. 고모들 말로는 당시 중학생이던 아빠가 사기꾼들의 멱살을 잡기도 하고 호통도 쳤다고 했다. 아빠는 당시 할머니와 고모들을 지키기 위해 강한 척, 어른인 척해야 했고, 그때부터 조금씩 엇나갔다고 했다. 그런 말을 하며 고모는 너무 싫어하지 말라고 했다. 고모들에게 아빠는 당시 할머니와 고모들을 지켜준 어른으로 기억되는 듯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인 엄마와 누나, 나 에게는 절대 닮아서는 안될 못난 아빠로 기억되고 있다.

 

‘한창 어리광을 부릴 나이에 가정에 대한 책임감까지 받아들이는 어른이 되어야 했기에, 진짜 어른이 되어서는 다시 어린아이가 된 것이 아닐까?’ 이 부분은 내가 어른이 되고 아빠라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했던 부분이다.


 아빠는 지금 60년 인생 중 가장 성실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평생 ‘일’ 이라고는 제대로 해보지 않았던 사람이 공장을 주 6일씩 다니며 성실히 돈을 벌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만두기도 하고, 내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또 사업구상을 했지만, 이제는 평범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듯 보인다.


 아빠는 아직 내가 정말 힘들게 계약직으로 일하며, 박봉에 학자금 대출을 겨우 갚으며 사는 줄 안다. 하지만 나는 취업을 비교적 잘해서 꽤나 괜찮은 곳에서 잘살고 있고, 학자금도 작년에 전부 갚았다. 내가 힘든 척하는 이유는 아빠와 살면서 수없이 학습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기댈 곳이 있으면, 지체 없이 그곳을 잡고 늘어진다. 난 엄마의 전철을 밟을 수 없었고 망설임 없이 거짓말을 했다. 아빠한테는 좀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여태 엄마를 괴롭혔고, 누나와 나를 힘들게 했으니 이제 아빠도 고생을 좀 해봐야 된다고 생각했고, 이제는 제발 혼자 힘으로 열심히 살아가길 바랬다. 그런 내가 오늘, 눈앞에서 아빠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빠는 땀에쪄든 조끼에 생전 안 해본 팔토시를 끼고, 불에 데이지 않기 위해 이 더운 날에도 장갑을 3개나 끼고 있었다. 아빠가 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보여주며 ‘진창아 아빠 이렇게 열심히 산다’라고 말하는 듯 뿌듯함에 이를 훤히 드러내고 웃을 때 앞니가 두 개나 빠져 있는 모습에서 난 무너졌다. “아빠 나 잠깐만 화장실 좀 갔다가 올게” 하며 차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도저히 멈추질 않았다.


‘왜 그러는 거야….. 그냥 적당히 지금처럼 철없이 밉상으로 나한테 피해 끼치지 않고, 적당히 살고, 내가 죄책감 안 가지게 한 번씩 얼굴이나 보고 그렇게 살면 되지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냐고…. 사람 이상해지게….’

나는 그렇게 열심히 살기를 바랐던 아빠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고 무너져 버렸다. 앞니 두 개가 빈 것이 자꾸 내 가슴에 난 구멍처럼 휑하게 느껴졌다.


 조금 추스르고 아빠와 함께 밥을 먹으러 갔다. 돈도 없으면서 자꾸 비싼 걸 시켰다. 어탕에 장어구이집인데, 비싼 장어구이를 자꾸 먹으란다. 아빠가 살 거라고, 그걸 먹었다. 최근 같이 밥을 먹으면 항상 아빠가 샀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고생 좀 해야지, 아들한테 해준 것이 없으니 밥이라도 사줘야지’ 하지만 오늘은 억지 부리는 아빠를 어떻게든 앉히고 내가 밥을 샀다. 그래야 마음이 덜 아플 것 같았다. 밥을 다 먹고 나서는 할 말도 없으면서 꼭 커피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요즘에는 그래도 대화를 조금씩 한다. 오늘은 공장에서 키우는 커다란 강아지 이야기를 했다. 옛날부터 강아지를 참 좋아했는데, 강아지 사진을 보여주며 해맑게 웃는 아빠 얼굴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아빠가 이렇게 웃을 수도 있었나? 아빠와 이렇게 오랫동안 대화를 한 적이 있었나?’


 그리고 이제 가자며 아빠와 함께 카페를 나왔다. 아빠는 조심해서 가라며 비어 있는 앞니를 훤히 보이며 날 배웅해줬다. 그리고 도착해서는 또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받아보니 잘 갔냐는 전화였다. 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응 도착했어.”, “그래 운전 조심해서 해라” 하며 끊는 두 마디뿐인 전화. 이전화를 하기 위해 여태 안 자고 기다린 아빠.

 언제부터 인가 아빠와 밥을 먹고 올 때 나는 늘 집에 돌아가기 바빴지만, 아빠는 꼭 전화해서 잘 갔는지 확인을 했고, 운전 조심하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또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너무 아팠다. 아프면 안 되는데 너무 아팠다. 오늘의 기분을 애써 잊고 내 생활에 집중하려 평소 듣지도 않던 라디오와 시끄러운 노래를 들으며 올라왔다. 그런데 전화를 끊으며 애써 막고 있었던 감정들이 터져 나오며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그 울음의 끝에서 나는 조심스레 ‘아빠는 그래도 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걸까 ‘라고 생각해보게 되었다.


에필로그

마지막에 눈물이 터져 나왔던 이유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던데, 우리 아빠는 아빠도 없어서 더 힘들었겠구나, 그래서 세상도 서툴고 아빠라는 역할도 더 서투를 수 있었겠다. ‘


‘이렇게 못된 아들이라도 잘 갔냐고 조심해서 운전하라고 걱정하는 모습에서 그래도 아빠구나’

힘들게 막고 있었던 미안함이 터져 나왔다.


아빠도 ‘리얼월드’에 살게 되면서 사람 사는 세상을 배워가고 있다. ‘늦었지만 아빠라는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혹시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위험한 믿음을 가져보고 싶어 졌다.


//아빠한테 다른 건 몰라도 임플란트는 해줘야 할 것 같다. 물론 회사 복지가 계약직한테도 해당돼서 공짜로 할 수 있다는 거짓말을 하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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