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 할머니의 명복을 빌며 씁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것을 대하는 사람에 대해 쓰려고 합니다. 지난주 별세하신 처 할머니의 명복을 빌면서 글을 쓰고자 합니다. 최대한 담담한 어투와 함께 느낀 그대로를 쓰고자 합니다.
죽음은 지극히 개인의 것이다. 무관한 사람의 죽음은 어떤 의미로 기억되지 않는다. 내 가족의 죽음은 팔다리가 찢겨나가는 심정의 것이다. 이렇게 상이한 감정으로 다가오는 동일한 사건 중 하나일 수 있다.
아내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생전 뵌 적이 없는 분과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 사이에서의 죽음이란 감정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담담하면서 울적한 기분으로 장례식장을 향했다. 저녁에 도착한 빈소의 조용함은 입구부터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 향 내음과 고깃국의 냄새가 어우러졌다. 생전 뵌 적 없는 분이다. 그분 앞에 향을 올리고 절을 하고 명복을 빌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할머니다. 영정 속 할머니는 사진을 찍으시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궁금했다. 곱게 단장한 얼굴에서 무표정이 묻었다.
상갓집 상차림은 잔치집과 다름이 없다. 고기와 전 그리고 술과 국이 멀리 달려온 허기를 달래 주었다. 맛있게 보다는 달래 주는 느낌이다. 장인어른이 사위를 인사시키신다. 누구의 누구, 몇 촌의 누구와 같은 생소한 관계로 설명되었지만 가족이라는 간결한 단어로 이해되었다. 이 곳 사람들은 내 가족인 것이다.
차 안에서 눈을 붙이자 아침이 되었다. 히터를 틀고 잤다는 말에 첫째 큰엄마란 분이 혼을 내셨다. 어제 낮까지 남이었지만 오늘 아침에는 가족이다. 장례는 복잡하다. 그래서 장례지도사가 따로 있었다. 짧게 자른 머리와 단정하게 바지 정장으로 말쑥하게 차려입으신 중년의 여자분이다. 그분께 죽음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직업으로서의 죽음과 개인으로서의 죽음은 어떻게 차이가 있을지 궁금했다. 지도사의 안내에 따라 장례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너무 말끔한 처리는 슬플 시간도 모자라게 만들었다.
관을 짊어졌다. 그 뒤를 따랐다. 슬플 시간은 계획된 시간에 슬펐다. 리무진에 실리면서 슬펐다. 살아생전 못 타보신 외제차를 이제야 타게 되셨다. 장례는 살아남은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굽이굽이 시골길을 따라 생전 집에 도착했다. 여전히 남아있던 마을 노인들이 나와 할머니의 죽음을 슬퍼했다. 함께 한 삶의 조각이 부여잡은 큰 아들 손으로 전해졌다. 파란색 지붕과 마당이 있는 큰 집이 나왔다. 망자가 되어 온 집은 서늘했다. 딸은 집을 치면서 구석구석에 남은 악귀를 몰아내고 아들은 홀로 남은 개를 돌봤다. 방문을 모두 열어젖히고 할머니 사진을 구석구석 모시고 갔다. 저승에서도 이승의 좋은 기억이 남길 바라듯 활짝 열어젖혔다. 큰 집엔 눈물과 깨진 바가지 소리만이 남았다.
다시 굽이굽이 시골길을 돌았다. 평소의 길이 오늘은 다르게 느껴졌다. 신호등의 색깔마저 삶과 죽음으로 해석하는 철학자가 되었다. 그렇게 화장터로 향하고 있었다. 도착한 화장터는 말끔한 모습이었다. 슬플 틈을 주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와의 마지막 인사 시간이 왔다. 육신을 자연인과 동일시하는 우리에겐 화장터 들어가기 직전의 인사가 마지막 인사 같았다. 큰 아들은 흐느끼며 남은 사람들의 안녕을 빌었다. 마지막까지 아들에겐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세상은 또 한 사람의 어머니를 보내드렸다.
작은 모습으로 변한 할머니를 모시고 몇 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 묘로 이동했다. 할머니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렇게 묻히는 모습을 보며 슬프지만 울음은 없었다. 할아버지 옆에 있으니 그래도 덜 슬프 하는 말은 한 공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위로가 되었다. 슬픔은 그렇게 줄어들어갔다. 그렇게 세상은 살아남은 사람에게 삶을 돌려주었다. 죽음은 망자의 것이고 장례는 남은 자의 것이었다.
처 할머님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