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으로 가는 길
유전자 탓을 하기엔 다소 비겁한 감이 없지 않지만 나 자신만을 탓하기도 억울한 면이 있어서 이 글을 쓴다. 되고 싶은 어른상은 없어도 되기 싫은, 절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어른상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어려서, 젊었을 때는 또 젊어서, 수용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 그런데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보니 이제는 좀 알겠다. 그분들이 왜 그런 행동과 말들을 했는지. 그렇다고 그것이 당연하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까지도 닮고 싶지 않고, 닮지 않으려고 나름 애쓰는 면모들이 몇 가지 있는데 이것이 집집마다 공통적인 풍경들인지 우리집만의 전통인지는 모르겠다.(혹시 이 글로 엄마 아빠의 명예에 흠이 된다면 부디 용서하옵소서)
명절이나 특별한 날(생일, 졸업, 어버이날, 성탄절 등)을 앞두고 꼭 다투셔서 당일 분위기와 흥을 미리 깨버린다거나, 체끼를 동반한 밥상 교육이란던가, 등교 전 기어코 던지는 잔소리 폭탄 등의 집안 문화가 그렇다. 아무리 내 기분이 상한다고 해서 남의 하루까지 망칠 필요는 없는데 부모님의 한 소리에 하루종일 마음 한 구석에 추를 맨 듯한 기분은 정말 싫었다. 예민함이나 까칠함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권을 망치는 것 또한 당연지사는 아닐텐데 그 때는 그저 억울하기만 했다.
그리고 무슨 날이 돌아오는 게 불편했다. 보통의 평범한 날이 차라리 더 나았다. 빨간날 트라우마랄까? 무슨 날이 오기도 전에 먹구름이 몰려왔으며, 식사 교제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꼭 그 시간이면 밥상에 잔소리까지 얹으시고, 아침부터 욕을 먹으면 될 일도 안 된다는 걸 모르시진 않으실텐데 왜 늘 뒤통수를 따갑게 하시는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글이 부모님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는 거라면 용서하시옵소서. 이 외의 모든 점에선 성은이 망극하옴을 이 소인 모르지 않나이다). 그래서 다짐했었다. 나는 절대로, 절대로 그러지 않겠노라고.
세월이 흘러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내 안에도 이상한 DNA가 존재한다는 걸.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수용할 수 없던 그 행동과 말을 나 자신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날의 충격이란. 그렇게 다짐을 했건만 그분들과 똑같은 행동과 말을 내가 하고 있었다. 내가 내 아이에게. 무슨 날을 앞두고 남편과 싸워서 아이를 불안하게 하고, 밥 먹을 때 밥맛 떨어지는 얘기를 아이의 면전에서 아무렇지 않게 하고, 등교하는 아이에게 하루의 저주를 마구 쏟아놓는 형편없는 어른이 바로 나였다. 한편으로는 그분들이 어떤 이유로 혹은 어떤 심정으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를 알게 됐지만 아무리 그래도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었다. 나도 별 수 없는 건가 싶은 마음에 당혹스럽고 울적했던 그 날을 잊을 수 없다. 죽도록 싫었지만 그 마음과 함께 뿌리 내린 악습들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가 엄마가 되길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 나온 그 날을. 어떻게 말씨 하나 다르지 않을 수 있지? (소오름!)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유전자 탓? 환경 탓? 아이 탓? 어른이라면 어른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내 생각에 금이 쫙 가는 순간을 경험하고 어른이라고 다 어른스러울 수 없다는 사실 또한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다짐만 가지고는 안 되는 거였다. 매일 매일 조심하고 또 조심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때론 알고도) 튀어 나오는 상식 밖의 언행들은 나이나 권위가 해결해 줄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유전 탓이든 환경 탓이든 이런 악습은 나의 세대에서 끊어내야 함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오늘도 나는 역지사지를 외친다. 아이를 위해. 지구의 평화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