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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Lapres midi Sep 22. 2023

시고 씁쓸했던 석류즙의 맛

두 어머니와 석류즙

대체로 45~55세까지를 갱년기로 보고 있다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보편적 경우이고 모든 일에는 예외란 게 있기에 갱년기 또한 저마다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시기도 증상도. 내가 막 결혼했을 때 시어머니 연세가 60대 초반쯤 되셨는데 어머니께선 그때 당신이 갱년기인 것 같다고 하셨다. 그래서 갱년기는 60대 전후로 나타나는 증상인줄 알았다.(무지의 극치!)

“폐경하고 나니까 복부에 살이 엄청 붙더라”라고 하신 어머님 말씀. 복부 비만이 폐경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그때는 믿지 않았다. 운동을 안 해서 그러신 거겠지 했다. 하지만 이젠 안다. 어머님 말씀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단순히 운동 부족이 아니었다는 걸. 운동 중독인 친정 엄마도 복부 비만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으신 걸 보면.  


어머님은 56세쯤 폐경을 하셨고 그 전후로 갱년기가 시작되신 듯했다. 그런데 60을 넘어서도 여전히 갱년기 증상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 해에 아들 둘을 연달아 분가시키시더니 오히려 더 심해지셨다. 전에 없던 오십견이 생기고 화와 우울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하곤 했는데 하루종일 누워만 계신 날도 있으시다고. 아마도 빈 둥지 증후군까지 찾아오지 않았나 싶다. 그동안 여자의 몸과 마음에 무심하고 무지했던 나는 내 몸에 이상 징후들이 보이고 나서야 그분들을 이해하게 됐고 용납하게 됐다. 사춘기뿐만 아니라 갱년기도 곁에서 돌보고 챙겨야 한다는 걸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누가 좀 미리 알려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 와서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두 여인 앞에선 찍 소리도 할 수가 없다. 너무 민망하고 죄송해서.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일화가 하나 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글쓰기는 가끔 열지 말아야 할 상자도 열게 한다. 어느 날 어머님 댁에 갔을 때였다. 어머님이 남편과 나에게 석류즙을 한 개씩 주시면서 마시라고 했다. 홈쇼핑에서 몇 박스 샀다며 좀 가져가라고 하시기까지. 물색없는 며느리는 어머니께 물었다.

“그런데 웬 석류즙이에요?”

“석류즙이 갱년기에 좋대.”

“아! 그럼  다음엔 저희가 사 드릴게요.”

어떨 결에 마신 석류즙은 굉장히 시고 씁쓸했다. 민망하고 죄송한 마음이 이런 맛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해 명절엔 농협에서 석류즙 한 박스를 사서 친정에 갔다. 엄마가 물었다. 

“웬 석류즙이야?”

“이게 갱년기에 좋대. 엄마도 마셔봐. 그리고 좋으면 얘기해. 내가 또 사줄게”

“갱년기가 뭐라고 이런 비싼 걸 사와. 담엔 엄마가 알아서 사 먹을게” 

온갖 호소를 다 하시면서도 막상 몸에 좋다는 걸 사드리면 늘 돌아오는 대답이다.  물론 그 후로 엄마는 좋다 나쁘다 말씀이 없으셨고 나는 또 까무룩 잊었다. 한 번으로 끝난, 생색만 가득한 효도였다. 석류엔 천연 에스트로겐이 풍부해서 갱년기 증상을 완화시켜 준다는 사실도 최근에야 알았다. (하지만 석류즙 과잉섭취는 또다른 부작용을 낳기에 조심해서 먹어야 한다) 


나는 불효녀다. 엄마와 시어머니의 갱년기는 무심하게 반응해 놓고 막상 내 일이 되니 앓는 소리를 하는 걸 보면. 어쩌면 나는 이제 시작일 뿐인데. 외롭고 서러웠을 그 시간을 그분들은 오롯이 당신들 몫으로 감당하셨던 건데 난 뭐라고 이렇게 글까지 써가며 야단법석 인 건지. 개인차가 있단다. 하늘의 복을 타고난 누군가는 이 시기를 가볍게 지나가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 하늘의 복을 타고나지 못한 탓이라고 해두자. 첫 사춘기를 심하게 앓는 사람은 인생의 두 번째 사춘기도 이렇게 유난스러울 수 있다고 해두자. 그리고 이제까지 경홀히 여겼던 여자의 몸에 대해, 삶에 대해 조금은 더 관심을 가져보자고, 내 딸이 겪고 있는 2차 성징도 가볍게 보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누군가를 배려하고 이해하려면 일단 알아야 하는데 나는 그걸 매번 온몸으로 배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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