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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마지막길

by 세피아리

자정이 다 될 무렵. 지친 몸을 이끌고 자취방에 들어와 침대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등을 새우처럼 모았다.

그나마 아늑한 자세였다. 이렇게 누우면 불안감으로 두근두근 뛰던 내 심장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손에 꼭 쥔 핸드폰은 연락 한 통 없이 잠잠했다.

이주일 전부터 지방에 있는 나를 대신해 며칠째 오빠가 엄마의 병실에서 출퇴근을 했다.

엄마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점점 더 자는 시간이 길어졌고, 맥박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인간의 존엄성 마저 잃어버리는 것 같다고 기저귀에 변을 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 몇 개월을 변비로 고생했던 그녀가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변을 많이 보기 시작했다.

요양병원의 의사는 그런 엄마를 보며 우리에게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외가 친척들의 말없는 눈총에 못 이겨 아빠도 결국은 회사를 그만두고 엄마의 병실에서 밤낮을 보냈다.

그 와중에도 지방에 있는 나는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언제 울릴지 모를 벨을 대비해 음량을 최대치로 높인 다음 귀 옆에 두고 잠을 청하는 것 밖에 없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무력한 나 자신에 대한 원망과 죄책감이 밀려들어왔다.

머릿속으로 제발 하루만 더, 제발 이틀만 더를 반복해서 되뇌었다.


12월이 되고부터 회사 업무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입사를 하고 처음 겪는 연말이었다.

주변 동료들에게서 내가 일하는 부서는 마감 때문에 연말에 무척 바쁠 것이라는 얘기를 들어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바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았다.

쉴 틈 없이 밀려오는 업무를 처리하고 나면 어느덧 6시가 훌쩍 넘어었었다. 당장이라도 기차를 타고 엄마를 보러 가고 싶었지만 동료건 상사건 다들 야근에 허덕이는 터라 업무를 누구에게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할 때 최대한 일을 해놓는 것이었다. 언제 전화가 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매일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초조한 마음으로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가길 반복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엄마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힘겨웠지만 한 자 한 자 입을 떼어서라도 의사소통을 하려고 노력했던 엄마는 어느 순간 입을 꾹 다물어 버렸고,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면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있었던 그녀는 이제 더 이상 휠체어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암을 이겨내고 말 것이라고 의지를 다지면서 열심히 했던 재활치료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했다. 밥도 넘기지 못해 간병인이나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환자전용 유동식을 콧줄을 통해 넘겨주었다. 화장실만은 포기할 수 없었던 엄마는 더 이상 배변도 가리지 못했다.

그 무렵부터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처음엔 온 가족이 나서서 엄마를 달래도 보고 울지 말라고 애원도 해보았다. 불쌍한 엄마를 보며 같이 울기도 많이 울었다. 하지만 원인 없는 엄마의 울음은 밤이 새도록 그칠 줄을 몰랐다. 간병인은 들어오자마자 그만두기 일쑤였고, 다른 병실에서도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엄마였지만, 가끔은 자식인 나조차도 힘겨울 때가 있었다. 엄마의 울음 때문에 한숨도 못 잔 어느 날 아침. 엄마에게 콧줄로 유동식을 먹이고 나서 지친 상태로 병실 바닥에 멍하니 앉아있었는데, 엄마의 첫째 오빠이자 나의 큰외삼촌이 엄마의 병문안을 왔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단번에 내가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많이 힘들지? 많이 힘든 거 알아. 하지만 말이야. 이때가 좋은 거야. 나중이 되면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으니 말이야" 나를 위로하고자 했던 그의 말이 아직도 귀에 맴돈다.


그때 엄마의 마음을 조금 더 헤아릴걸.

그녀는 강단에 서서 100여 명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사회를 봤던 그런 사람이었다. 매년 연말에는 여기저기서 표창을 받았고, 회사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동시에 퇴직 후의 인생을 위해 밤늦게까지 자격증 공부를 하던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젠 제 힘으로 화장실도 갈 수 없게 되었다. 어쩌다 거울을 보면 해사하던 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한 사람만 남아있었다.

'왜 내가? 어째서 나만.'

그런 자신을 보며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원망과 분노가 결국은 눈물이 되어 터져 나왔을 것이다.


그녀의 한(恨)을 왜 나는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을까.

이젠 전부 속절없는 후회다.


새벽 다섯 시 반이 지날 무렵, 핸드폰 벨이 힘차게 울렸다. 오빠의 전화였다.

"엄마가 오늘 떠났어."


2016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몹시 추운 새벽 어느 날, 사랑하는 엄마는 조용히 세상을 떠나 머나먼 여행길에 올랐다.


엄마의 장례식장에는 고맙게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었다. 먼 곳에서 온 친척들. 오자마자 엄마의 영정사진 앞에서 오열한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엄마의 회사에서 온 사람들, 나와 오빠의 회사에서 온 사람들. 그리고 검은 상복을 입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울던 나의 이모.

조문객들은 엄마의 영정 사진 앞에 절하고 상주인 오빠에게 인사했다.

그는 3일 내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혼자 상주역할을 해냈다. 의연했고, 침착했다.

엄마가 이 모습을 봤다면 분명 대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의 아들이자, 늘 눈에 밟혔던 엄마의 첫아이.

그 아이가 자라 엄마의 품을 떠나 이렇게 홀로 섰다.


엄마를 어디에 모실 지에 대해 가족들 간 약간의 이견이 있었다. 아빠와 할머니는 엄마를 아빠의 고향에 있는 선산에 모시길 희망했다. 가족들을 위한 묫자리가 있다고 했다.

나와 오빠는 완강히 거부했다. 선산에 모시면 오가기 힘들어서 외가 식구들이 자주 들르지 못한다는 이유였지만 내가 친가 식구들에게 말하지 않은 진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엄마가 죽어서는 자유롭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살아생전 그녀에게 굴레처럼 지워진 그 역할을 벗어던지고 온전히 그녀 자신으로 남길 원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누구의 아내도, 엄마도, 며느리도 아니었다.

이 싸움에서 아빠는 졌다. 자식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그는 뜻을 꺾었고 엄마는 추모공원에 모시기로 했다.


엄마의 장례가 끝나고, 나는 전주의 집으로 돌아와 엄마의 옷가지를 챙겼다.

다음날 일찍 외할머니의 집으로 가서 엄마가 입던 옷을 태우기 위해서였다.

엄마가 마지막까지 입었던 자줏빛의 내복에서 그녀의 냄새가 났다.

나는 그 옷에 얼굴을 파묻고 또다시 한참을 울었다.


새삼 집을 둘러보니 엄마의 손길이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김치냉장고에 한가득 들어있던 김치와 냉장고에 꽁꽁 얼려둔 쑥떡, 그리고 그녀가 담근 매실액.

곳곳에 엄마의 물건은 왜 이렇게 또 많은 건지.


엄마의 흔적이 너무도 많아, 이제 더 이상 그녀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금방이라도 현관문을 열고 그녀가 들어올 것만 같았다.


엄마의 옷을 태우고 집으로 가는 길에 회사에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번호를 보니 우리 과의 부서장이었다. 의미 없는 위로의 말들이 오갔다. 그리고 몇 초간의 망설임 끝에 그가 본론을 말했다.

"미안한데, 정말 너무 바빠서 그래. 나도 전화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다. 혹시 내일 나와줄 수 있겠니"

통상 부모상의 특별휴가는 5일이다. 나는 좀 더 마음을 추스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특별휴가를 다 채우지 못하고 출근했다.

원망은 안 한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직장이라는 조직이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 않나. 그도 내게 전화하는 것이 정말로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회사에는 답례로 떡을 돌렸다. 생각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주었고, 그게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나는 장례식 이후로 단 한 번도 사람들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다만, 이후로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엄마라는 두 글자를 그 누구 앞에서도 말할 수 없었다.

나 혼자서 '엄마'라고 부르면 죽는 게임을 하는 것 같이 말이다.


그녀가 떠난 후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질 줄 알았다. 어떤 전환점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 인생은 그 이후로도 크게 달라진 것 없이 느리고도 빠르게 흘러갔다.

그로부터 6년 뒤에 나는 결혼을 했다. 엄마가 그토록 원망했던 아빠의 손을 잡고 입장했고, 엄마가 결혼식장에 절대 초대하지 말라고 울면서 말했던 엄마의 시어머니이자 나의 할머니가 드레스를 입은 내 곁에서 엄마 생각이 나는지 한참을 울었다.

화촉은 이모가 밝혔다. 가족사진을 찍을 땐 오빠의 여자친구도 함께했다.

1년 뒤, 구김 없이 밝고 사랑스러운 그녀는 나의 새언니가 되었다.


나의 남편과 새언니는 매년 엄마의 기일을 챙기며 얼굴도 본 적 없는 장모님과 시어머니께 인사를 하고 그 앞에 꽃을 놔둔다.


아빠는 우울증을 겪었다. 살아서는 죽도록 싸워댔던 아내가 없으니 잔소리할 사람도 없고 마음이 편하겠거니 하고 나는 속으로 아빠를 은근히 빈정댔었는데, 3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의 고락을 함께한 아내를 잃은 그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충격에 한동안 헤어 나오질 못했다.


이모는 아내에게 헌신적인 이모부와 가족들의 힘으로 상실의 슬픔을 이겨냈다.

그래도 가끔은 언니가 생각나는지 엄마 얘기가 나오면 눈시울을 붉힌다.


우리 가족은 각자 자신의 슬픔을 짊어지고 살고 있다.

어느덧 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이제는 만나서 엄마 얘기를 꺼내도 울지 않지만, 모두들 알고 있다. 슬픔이란 옅어질 순 있어도 결코 사라질 수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 글을 끝으로 나는 엄마와 작별을 하고자 한다.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살아생전 엄마에게 자주 하지 못한 그말.

엄마를 정말 많이 사랑한다고.

그리고 엄마를 잊지 않게, 자주는 아니어도 좋으니 가끔이라도 꿈에 나타나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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