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고민하고 결제하고 취소하고 결제하고
주변에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얼굴에는 짙은 피로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다시 해외로 떠난 형수가 일에 몰두하며 괴로움을 잊는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격한 감정이 일었던 것을 기억한다.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문득, 내가 변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감정의 파도가 거세졌고, 그 흐름을 온전히 제어하기 어려워졌다.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마치 긴 터널의 입구에 선 것처럼,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즐거운 일에 온전히 몰두하지 않으면 이 시간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군가는 부모를 잃은 슬픔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일이라고 했지만, 내 주변에는 부모 모두를 잃은 사람은 없었다. 장인,장모님도 어머니가 아직 살아계셨다. 적어도 내 주변에는 날 이해할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마치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핑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아내 역시 나의 선택을 지지해 주었다. 오래전부터 함께 꿈꿔왔던 여행이 문득 떠올랐다.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잠시 잊고 있었던 꿈. 마치 깊숙이 넣어둔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 보듯, 조심스럽게 그 꿈을 다시 펼쳐보았다. 여행은 단순한 휴식이 아닌, 상실의 시간을 건너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여정이 될 것이었다.
2023년,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지만, 아내는 겨울을 싫어했고, 유럽의 겨울 여행을 만류하는 이들도 많았다. 무엇보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부모님의 흔적들과 회사 일을 마무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여행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라는 5월, 2024년 5월 말을 여행의 시작점으로 정했다. 그때쯤이면 마음의 짐도 조금은 덜어져 있지 않을까, 희망했다.
가장 먼저 항공권부터 알아봤다. 다행히 모아둔 마일리지가 있어 비즈니스석을 예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원하는 날짜의 좌석을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마일리지 소진 시기가 촉박했고, 1년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좌석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회사에서도 틈틈이 항공편을 검색한 끝에, 스타얼라이언스 제휴 항공편을 이용하여 방콕을 경유하는 프랑크푸르트행 비즈니스석을 예약할 수 있었다. 마침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아내의 친구를 만날 계획이었기에, 자연스럽게 프랑크푸르트가 첫 번째 목적지가 되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났다. 우리가 여행을 계획한 시기가 파리 올림픽과 유로 2024 축구 대회 기간과 겹친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이후 서유럽을 여행할 계획이었기에, 올림픽 기간에는 파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항공편과 숙박은 이미 영향을 받고 있었다.
항공권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자, 이제는 여행 경로와 숙소를 정해야 했다. 수많은 여행 서적과 온라인 정보를 찾아보며 밤늦도록 여행 계획을 논의했다. 프랑스 TGV와 독일 고속철도 예약 일정을 확인하며, 예약을 반복하고 일정을 조정해야 했다. 올림픽은 숙소 예약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파리 인근의 숙박 시설 가격은 터무니없이 치솟아 있었다. 우리는 여러 숙박 예약 사이트를 비교하며 최대한 빨리 예약을 진행하려 했지만, 원하는 곳은 이미 예약이 완료되었거나 가격이 너무 비쌌다. 결국, 올림픽 기간을 피해 여행 일정을 일부 조정해야 했다.
여행 준비는 예상치 못한 난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을 키워나갔다. 이 여정을 통해 상실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5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날을 기다리며, 우리는 마지막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약 9개월 여행을 준비하며 나는 꽤나 바쁘게 지냈다. 회사에서는 일을 했고 집에와서는 여행을 준비했다. 그 사이사이 문득 우울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다가올 일정에 대한 기대가 그런 우울함을 조금은 밀어내어 주었다.
줄어드는 잔고가 걱정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이 나의 잔고가 줄어드는 것을 일정부분 막아주었다. 나는 이 여행이 부모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동안 고생했다는 의미로 나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