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꽤나 재미있는 존재였다. 그 중에 가로수는 특히 더.
지혜는 가로수와 대화를 하다 보면 가끔 또래의 사람이랑 대화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게 가로수가 상당히 트랜드한 구석이 있었다. 인간의 역사와 발전은 당연히 아는 것이었고 온갖 이슈와 최신 유행을 줄줄이 읊었다. 요즘 대표적인 아티스트의 노래를 한 소절 흥얼거릴 때-그것도 웬만한 가수가 울고 갈 정도로 잘 불렀다-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대체 이 노래를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묻자, 다른 나무에게 속삭여서 알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속삭이기만 하면 모든 다 알 수 있다나 뭐라나. 그 말이 틀리지 않게 실제로 가로수가 알고 있는 지식의 양은 한도 끝도 없었다. 덕분에,
- 한시도 속삭이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결과예요. 덕분에 누리고 싶은 것을 모두 할 수 있어요. 인간으로 치자면 부자인 셈이죠. 저희는 지혜가 곧 자산이거든요.
이렇게 가끔가다 우쭐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 있잖아요, 제가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요. 혹시 지혜 씨는 어릴 때 '산타'라는 사람을 본적 있나요? 그냥 혹시나 해서 묻는 거예요. 없으면 말고요. 아니에요. 믿는 건 아니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네? 만난 적 있어요? 역시 있구나!
아이 같을 때도,
- 나무로 태어나서 싫었던 적이야 많이 있죠. 결국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더라고요. 움직일 수 없으니까.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 도와준다는 건 애초에 없더라고요. 그래도 괴로워요.
방황할 때도,
- 겨울이 싫진 않아요.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아도 싫지 않아요. 그때가 있어야 제가 품을 수 있는 게 많아지거든요. 봐요, 이렇게 지혜 씨에게 그늘이 되어줄 수 있잖아요.
찬란할 때도 있었다.
가로수를 보고 있노라면 재밌었다. 사실 재미있다는 표현은 상당히 일차원적이었으나 그렇다고 입체적으로 표현하기는 넘기 힘든 선이 있었다. 어쨌든 가로수는 뼛속까지 나무였다. 그 사실이 못내 아쉽다면, 여러 가지 표정을 보고 싶고, 다양한 몸짓을 보고 싶다고 한다면, 그게 다 무슨 의미일까.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그 자리에는 선이 그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곧 출발선이었다.
지혜는 공부를 하다가 머리가 아파올 즈음 훌쩍 길을 떠났다. 주로 어둑한 밤 시간 때였고 대화를 시작하면 까마득한 새벽까지 한참을 떠들었다. 야외에 오래 앉아 있다 보니 가끔씩 손등이나 다리에 개미가 기어가곤 했다. 옷에 정체 모를 벌레가 붙기도 했다. 그때마다 한바탕 난리를 피워야 했지만, 일과를 마치면 부리나케 출발선에 섰다. 오늘도 어김이 없었다.
지혜는 가로수를 만나자마자 내일 있는 시험이 무섭다고 하소연 했다.
- 제가 뭔가 도와 줄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시험 문제라도 알려드리면 좋을 것 같은데…….
순간 혹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 알 수 있는 방법이야 많죠. 지혜 씨 교수님 책상 위에 있는 화분에게 속삭이면 돼요. 아마 헐 값에 알려줄 걸요?
잠시나마 죽을듯한 갈등에 휩싸였다. 다행히 갈등은 오래지 않았다. 양심에 찔린다는 도덕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넙죽 받아버리면 인간을 얼마나 쉽게 생각하겠냐,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 이건 인간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 그래도 너무 힘들면 꼭 말해요. 이번에만 있을 기회니까요.
뒷말이 무슨 뜻인지 의문이 들었으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갑자기 방 안에 있는 화분이 퍼뜩 생각났기 때문이다. 잼잼이라고 이름까지 붙여서 정을 준 것이었다. 물을 주지 않고도 워낙 잘 자라서 이따금씩 존재 자체를 까먹었다. 지혜는 설마하는 마음에 혹시 잼잼이를 아냐고 물었다.
- 당연히 알고 있죠! 처음에 지혜 씨 관련으로 자주 속삭이다가 지금은 서로 너무 친해져서 굳이 속삭일 필요도 없어졌어요. 그러고 보니 최근에 잼잼 씨랑 도통 이야기를 안 했네요. 잘 지내고 있죠?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드디어 가로수에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과 신상 정보를 낱낱이 고한 범인을 찾았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나무와 화분을 의심했는지 모르겠다. 가만히 넘어갈 수 없어 날카롭게 따지자, 가로수는 풀이 죽었다.
- 죄송해요. 실례인 것을 알아도, 지혜 씨를 아는 데 별 방법이 없어서 잼잼 씨를 통했어요. 앞으로는 궁금한 것이 생기면 지혜 씨한테 맘껏 물어볼게요. 이젠 그럴 수 있잖아요.
지혜는 괜히 더 따져 물었다. 내가 너무너무 궁금해서 못 참을 수도 있잖아. 그땐 어떻게 할 거야?
- 그땐 잼잼 씨 더러 이파리 하나를 바닥에 떨구라고 할게요. 그럼 그걸 보고 지혜 씨가 절 만나러 와주세요. 어때요?
나름대로 괜찮은 제안이지만, 그러다 잼잼이가 상할까 걱정됐다.
- 잼잼 씨가 잎을 떨구기 전에, 지혜 씨가 절 찾아와주면 되죠.
지혜가 홱 째려보자 그제야 가로수는 최대한 잼잼이를 다치지 않게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썩 믿음이 가지 않아도 일단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지혜는 내일이 시험인 탓에 여기서 분위기를 갈무리 했다. 시험으로 인해서 당분간 못 올 것 같다는 예고를 남기자 가로수가 잠시 붙잡았다.
- 지혜 씨는 항상 시험을 치기 전에 불안해 했죠? 머리가 새하얘질 정도로 말이에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늘 그랬듯이, 문제를 보자마자 흰 백지에 거침없이 답을 써내려 갈 테니까요. 제한 시간까지 빠듯하게 시험을 마치고 나오면, 점수는 별로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누군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는 말을 들어도 지혜 씨는 자신의 점수에 기꺼이 만족할 거예요.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 했으니까요. 저는 지혜 씨의 그런 점이 너무 좋아요.
지혜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지혜 씨가 알고 있는 것을 쓰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너무 당연한 말인데 별로 이해되지 않았다. 인간은 나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속 편한 존재가 아닌데. 하기야 이해할 수 있겠나. 지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잼잼이는 그새 새 잎이 돋아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