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문제는 운이 좋게도 대부분 아는 것이 나왔다. 드물게 모르는 문제가 보였지만, 정답을 유추해서 적었다. 틀린 것에 안타까워하고 맞은 것에 좋아하니, 시험이 끝난 직후엔 아무것도 상관 없어졌다. 긴장이 풀린 육신이 나른했다. 집에 가면 배 터지게 먹어야지. 그리고 누가 엎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을 잘 것이다. 그렇게 두 시간 즈음 푹 자고 일어나면 꼭…….
함께 시험이 끝난 친구들이 벌떼처럼 모여 들어 놀자고 꼬드겼지만 지혜는 모두 거절했다. 벌써 오늘의 계획이 알차게 짜여 있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지금 만날 수 있어?』
그에게서 온 연락을 보자마자 지혜는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변질되었다. 지혜는 도무지 무슨 정신으로 그를 만났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그는 여전한 모습이었다. 생긴 것, 입는 것, 하는 것이 여전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을 나누자고 졸랐다. 지혜는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자신을 사랑하냐고 물었다. 사랑하니까 자지. 그 대답에 그와 함께 모텔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옷을 벗는데 문득 가로수의 말이 떠올랐다. 지혜 씨가 알고 있는 것을 쓰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알고 있지.
알고 있는데, 항상 답을 쓰기 무서웠다. 틀리면 마음 아플 테니까, 후회 될 테니까. 과거가 될 테니까. 그게 최선을 다 한 이유인데, 그저 상처 받기 싫어서 그런 것 뿐인데, 그 가로수는 대체 뭐가 좋다는 걸까? 이렇게 발가벗고 침대에 누운 게 좋은 걸까? 도무지 모르겠어서 두 눈을 내리 감았다. 제 주제에, 좋아하게 됐어요,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 만큼이요, 진심으로요, 으음, 글쎄요, 아마, 지혜 씨가 매일 이곳에 오는 이유랑 같지 않을까요, 맞아요, 이유가 어디 있어요. 숨이 가빴다.
"좋았어?"
그가 물었다. 어느덧 지혜는 탁상 위의 화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록색 잎사귀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닿지 못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빈 공간이 마치 그어진 선인 것만 같았다. 순간 가슴이 미어졌다.
네가 사람이었다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지 않을 텐데.
자책이 드는 책망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수단이 되곤 한다. 지금 지혜가 그랬다. 흑과 백, 오답과 정답, 좋고 싫음. 이런 이분법 따위로 이 세상의 전부를 결코 설명할 수 없지만, 지금은 오히려 명료해졌다. 어느 쪽이든 감내하고 싶은 영역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상처 받아도, 영영 닿지 못해도 괜찮으니까. 그냥 가로수와 있고 싶었다. 지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계획대로 였으면, 낮잠을 자고 일어날 시간만큼이었다. 더 이상 기다리 게 하고 싶지 않았다. 숨이 턱 밑에 찰 정도로 걷자, 온건히 서있는 가로수가 보였다.
- 기다리다가 몸통 빠지는 줄 알았어요.
마지막 시험이 너무 어려웠어. 지혜의 핑계에 가로수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 잠깐 제 몸에 등 좀 기대볼래요?
괜찮으니까 어서요. 가로수의 상냥한 부추김에 망설이던 지혜는 갈색 몸통에 살며시 등을 기댔다. 딱딱했지만 한 없이 부드러웠다.
- 오늘도 와줘서 고마워요.
모두 다 네가 말한 대로 했어, 라고 말할 뻔 했지만 끝내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밤바람이 찼다.
쿵쿵쿵, 어쩐지 가슴이 뛰는 듯했다.
그 무렵 지혜는 비슷한 꿈을 자주 꿨다. 가로수와 똑같은 목소리를 가진 남자가 나오는 꿈이었다. 지혜는 알 것 같지만 모르는 남자와 손을 맞잡고 여러 풍경 속을 정처 없이 헤맸다. 흔하게 봤던 길가에서부터, 선영이와 자주 가는 카페 앞,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복잡한 도심, 그 속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면 인영들이 불시에 수 억의 별이 되어 흩어졌다. 걷다가 멈추기도 하고 가끔은 뛰어야 했으나 잡은 손은 결코 놓지 않았다.
시간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갑자기 지나갔다. 봄 볕은 따가운 여름 볕으로 변모했고, 나무들이 저마다 푸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무렵부터 지혜와 가로수는 퍽 이상했다.
-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
가로수는 늘 똑같은 것을 물었고, 돌아온 대답에 안도하는 미소를 지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그랬다. 지혜의 하루는 그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시작됐다. 덕분에 지혜는 눈을 뜨자마자 누구를 만났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선명하게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지혜가 그렇듯이 가로수 또한 하루 동안 한 일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연인과의 대화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서 일까. 지혜는 가로수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싶어졌다.
- 대 체로 목이 말라요.
가로수로 사는 삶이 어떠냐는 질문에 대한 가로수의 대답이었다. 지혜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가로수는 바닥을 한번 보라고 주문했다. 고개를 떨구니 뿌리가 심어진 주위로 아주 좁게 가로수분이었고, 지천이 보도블럭이었다. 그리고 그 옆은 바로 하수구였다.
- 보도블럭은 건조하고 비가 와도 금방 마르거든요. 또 지면이 빗물을 잘 빠져나가게 설계가 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물이 고이지 않고 하수구로 다 빠져나가요. 아, 너무 걱정 말아요. 비가 오기만 하면 사는 데 별 지장은 없으니까요. 그래도 언젠가 제 뿌리만큼 물을 마셔보는 게 소원이기는 해요.
가로수는 밝게 말했지만 어쩐지 애쓰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지혜는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무기력한 기분으로 인터넷에 '가로수 보도블럭'을 검색했다. 어느 한 기사로 시작한 것은, 어떤이의 에세이, 전문가의 칼럼과 논문, 끝내 다시 기사로 이어졌다.
탄소가, 배출량이, 기후가, 지구 온난화가, 그래서 가로수는, 결국 나무가……. 연관으로 쏟아지는 모든 것들은 싸늘하게 만들었다. 지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인터넷 창을 껐다. 쿵쾅쿵쾅. 한 번 생각이 좁혀지자 심장은 불안으로 조여 들었다. 불안은 그저 불안으로만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가로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하게 메말라 갔다. 볕이 따가운 여름의 초입으로 다가왔을 때부터 눈에 띄게.
*
마르기 시작한 곳은 잎부터였다.
가로수는 거기서부터 죽어가고 있었다. 잎사귀 끝이 노랗게 마르더니 순식간에 갈색 빛이 되어 재처럼 뚝뚝 떨어졌다. 앞으로 여름방학이었다. 함께할 시간이 더 많아질 것이었는데, 분명 그랬는데. 여름방학에 다가올수록 가로수는 더 많은 잎을 떨궜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볼 때마다 지혜는 숨이 멈출 것 같았지만 괜히 모르는 척 했다. 그럴수록 볕은 더 타 들어갔다. 시간이 갈수록 모든 걸 태울 듯이 뜨거워졌다. 예년 기온보다 훨씬 웃돌았고 비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한 방울도.
가로수가하나씩 잎을 떨굴 때마다 옆에 있는 가로수도 그랬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가로수도. 가을도 아닌데 그 일대의 지천은 꺼져가는 나뭇잎이었다. 그 쯤 지혜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쓰레기를 주웠고, 사람들에게 당부도 했다. 그럴수록 혼자서 괴로울 뿐이었다. 끝끝내 지혜는 믿지도 않은 신에게 조금이라도 비를 내려달라고 빌었다. 두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예고대로 최악의 가뭄이 터졌다.
*
아픈 여름이었다.
지혜는 방학을 맞이했고, 가로수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 수 있었다. 하지만 산책 길에 있는 나무들은 모두 죽어나갔다. 그 일대를 관리하는 사람들은 죽은 나무를 도무지 두고 볼 수 없어, 통째로 태우기로 결정했다. 이미 이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가로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똑같이 지혜의 일상을 물을 뿐이었다.
- 오늘은 어땠어요?
잎을 떨구고, 가지가 뜯어지고, 몸통이 썩어가는 데도, 힘 없는 음성으로 한결 같이. 마지막 날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보이는 주변의 모든 곳은 공사 중이라는 바리케이트가 쳐졌다. 지혜는 버티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 아아, 울지 말아요.
넌 이럴 걸 알고 있었지? 그렇다면 왜 말을 걸었어? 그냥 죽었으면 좋았잖아. 이러고 싶지 않은데, 원망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실수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한참 늦은 후였다. 침묵이 계속 되었지만, 얼마 못 가 깨졌다. 가로수의 미약한 말소리 때문이었다.
- 안아줄래요?
한 순간에 무너진 지혜는 딱딱한 나무 몸통을 와락, 껴안았다. 온 힘을 다해서, 그렇지만 가로수가 부서지지 않게, 가능한 따스하게.
- 맞아요, 이럴 거라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그래도 저는 전하고 싶었어요. 알잖아요, 제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지혜 씨. 저는 나중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꼭 지혜 씨 앞에 나타날 거예요. 다 제 욕심이겠지만, 욕심을 부려서라도 그러고 싶어요. 그러면 지혜 씨가 이렇게 울 때 제 손으로 눈물을 훔쳐줄 수 있겠죠. 가족이든, 친구이든, 배우자이든.,어떤 모습이든 꼭 나타날게요. 그러니까 저를 믿어주세요. 길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손을 마주잡고 많은 곳을 가요. 이 세상 어디든지요.
손바닥 안으로 말라버린 나무 껍질이 붙었다. 지혜는 겨우 울음을 삼켰다.
가로수가 숨을 골랐다.
- 눈을 감아볼래요?
가로수의 말대로 지혜는 눈을 내리 감았다. 뺨으로 눈물이 흘러가는 게 느껴졌고 다음 순간, 머리에 섬광이 터졌다.
의식이 순간 퓨즈가 꺼지듯 내려갔다. 그렇지만 감각은 세포 하나하나가 느껴질 정도로 예민해졌다. 한 없이 예민해지다가 끝내 뇌에서 수 천 가지 폭죽이 터지는 게 느껴졌다. 터진 불꽃은 그대로 다른 신경에 전달되어 다시 불꽃을 일으켰다. 펑펑펑, 셀 수조차 없이 터진 것은 다른 곳으로 옮겨 붙기 무섭게 하나로 연결이 되었다. 마지막까지 연결이 되자 선을 이루었고, 결국 점 하나로 모였다. 그 점 속으로 지혜의 몸이 속절없이 빨려 들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드넓은 우주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 그리고 그 창백한 공간에선 끊임없이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쏴아아, 쏴아아. 마치 비가 오는 듯한 소리였다. 지혜는 그 소리를 듣고 울컥, 울음이 터졌다. 이건 나무들의 속삭임이었다. 너무나 따뜻하고 안온한.
목놓아 울며 한 없이 장대한 곳을 헤엄쳤다. 그러다 화들짝 눈을 떴다. 지혜는 어느덧 자신의 방 침대였고, 옆에 걱정스런 표정의 엄마가 있는 게 보였다. 엄마는 깨어난 지혜에게 이틀 동안 심한 열병에 시달렸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는 중에도 지혜의 시선은 잼잼이가 바닥에 떨군 잎이었다. 열에 시달리는 아픈 몸으로 산책 길로 달려갔지만, 이미 모든 나무가 뽑혀나간 상태였다.
지혜는 사막같이 황폐한 흙 바닥에서 가로수가 있던 장소를 겨우 찾았다. 그리고 뿌리가 심어졌던 밑바닥의 흙을 퍼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래 사는 풀 꽃을 심을 마음이었다. 미련이면 미련이었고, 집착이면 집착이었다. 사랑이라고 하면 또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