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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영구 Oct 15. 2020

사랑니

웹진 취향껏 11호 <SF>

그날은 네가 세 번째 사랑니를 뽑은 날이었다. 벌써 너는 세 번이나 사랑을 끝냈다니 묘한 기분이었다. 나는 여전히… 머리가 지끈지끈 울렸다. 익숙한 두통이지만 점점 거세지는 느낌이 들어 진통제를 두 알 털어 넣고 물 잔을 들었다. 진통제를 세 알로 늘려야 할까.



띠-띠-띠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현관문이 열렸다. 오른쪽 볼이 잔뜩 부은 것이 마치 심술 난 아이 같아 피식 웃었다. 너는 늘 그랬다. 기분이 나쁘거나, 속상한 일이 생기면 늘 나를 찾아왔다. 곧 내 침대에 가서 코를 박고 누워있겠지. 예상대로 너는 현관 바닥에 가방을 던져놓고 내 방으로 쏙 들어간다. 너를 구경하느라 물 마시는 걸 까먹은 탓에 진통제가 그대로 녹아 입 속이 쓰리다. 뒤늦게 물을 마셔봤지만 입 속이 텁텁한 것은 그대로다. 물 잔을 내려놓고 너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네 옆에 가서 나란히 누웠다. 그리고 물었다. 괜찮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어져 온 우리의 관계는 늘 이렇다. 네가 화가 나거나 슬픈 일이 생기면 내가 달래주는, 그런 관계. 우리의 관계와 방식은 변한 게 없는데 너는 조금 다른 기색이다. 세 번이나 사랑하고 난 뒤라 어른이 된 걸까. 너는 내가 부럽다고 말했다.



사랑니가 돋아나는 그 순간,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그 느낌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게 행복하거든. 근데 그걸 뽑아야 할 때 말이야. 그거 진짜 말로 표현할 수 없게, 좀 뭐 같아. 너는 좋겠다. 사랑 같은 거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서.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우리는 16세부터 사랑니가 나기 시작한다. 우리 세계에서 사랑니가 난다는 것은 곧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이가 차고 누군가를 절절히 사랑하게 되면 사랑니가 돋았다. 사람들은 사랑니를 보여주는 것으로 마음을 고백했다. 누구도 거짓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연인이 되면 서로의 사랑니를 등록할 수 있었다. 다만 그 관계가 끝나면 사랑니를 뽑아내야 했다. 그러면 사랑하는 감정이 사라진다고 했다. 어제까지는 우주에서 제일 아끼던 ‘연인’이 한순간에 ‘남’이 되는 거다. 그 경험이 무척 소름이 끼쳐서 다들 함부로 사랑하지 않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등록하지 않은 사랑니는 다른 사랑을 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요소였다. 사람들은 그런 사랑니를 ‘죽었다’고 표현했다. 죽은 사랑니는 썩기가 쉬워서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마음을 보여주었지만 연인이 되지 못했거나, 더 이상의 관계가 진전되지 않을 것 같으면 치과에 가서 죽은 사랑니를 뽑아냈다. 사랑니는 네 개. 그러니까 사랑을 할 수 있는 기회도 딱 네 번이었다. 의미 없이 한 번의 기회를 날린 사람들은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맸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다고 학교에서 배우긴 했었는데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분별한 사랑 때문에 사회적으로 사건이 많았다나 뭐라나.








나는 단 하나의 사랑니도 뽑은 적이 없어서 너를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네 사랑을 늘 지켜봐 왔으니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온몸을 불태워 사랑하는 너. 내가 아는 너와는 다른 너의 모습들. 키가 너무 작아서 너랑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남자와 연애했을 때에도,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항상 우아하게 발끝으로만 걸어 다니던 그 언니를 짝사랑할 때에도. 너의 사랑도 언제나 남들과 똑같이 끝났다. 언제나 베개가 촉촉하도록 눈물을 쏟아내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퉁퉁 부은 눈으로 술을 마셨으니까. 사랑니를 뽑아내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번엔 정말 멋진 사랑을 할 거라고 말하는 네가 놀라웠다.



네가 내게 쏟아놓은 ‘부럽다’는 말이 비수 같아서 내심 속상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유난히 힘이 없는 네가 걱정됐다. 이번 연애는 뭐가 달랐을까. 다음 사랑이 마지막이라서 심란한 걸까. 무슨 말을 해야 네 기분이 풀어질지 고민하다가 엄마에게 들었던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ㅡ 예전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랑이 시작되는지도 몰랐고 어떻게 해야 사랑을 끝낼 수 있는 지도 몰랐대.

ㅡ 사랑을 끝내는 방법을 몰랐다고? 그럼 영원히 사랑하는 거야?

ㅡ 그런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사랑하는지도 모르고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하는 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대. 그래서 사랑 때문에 살인하는 일도 빈번했다고 하더라.

ㅡ 아 뭐야. 차라리 지금 우리가 낫다. 적어도 사랑 때문에 누가 죽는 일은 없을 테니까. 옛날 사람들은 무서워서 길거리를어떻게 돌아다녔을까. 으 소름 끼쳐.








너는 손을 머리맡에 끼워 넣고 비스듬히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너는 왜 사랑 안 해? 하며 조용히 시선을 맞추는 너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되면 내 마음이게? 하며 대답하자 너는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내 말을 따라 했다. 그래. 내 마음대로 되면 그게 마음이게? 우리는 마주 보고 깔깔깔, 하고 웃었다.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환하게 웃는 너를 보니 온몸의 피가 머리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오른쪽 아래 어금니가 시큰거렸다. 오른쪽 볼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우리는 또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잔뜩 했다. 기분이 좋아진 너는 술 한잔 할래? 물었다. 오늘은 두통이 있어서 안 되겠다고 대답했다. 너는 기분이 뒤숭숭하니 술이라도 마셔야겠다며 우당탕 나가버렸다.






한참을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네가 나간 자리를 가만히 쓸었다. 네가 이번에는 정말 아프지 않은, 네가 바라던 멋진 사랑을 했으면 좋겠어. 어느새 시간은 저녁 즈음이었다. 아, 또 두통이 몰려왔다. 머리를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 입구에 걸려있는 거울 앞에 서서 입을 크게 벌렸다. 오른쪽 아래 어금니 뒤 사랑니가 새까맣게 썩어가고 있다. 거실 장을 열어 진통제를 세 알 꺼냈다. 하루에 진통제를 다섯 알이나 먹다니, 조금 서러워서 물도 없이 씹어 삼켰다. 온종일 입안이 썼다. 어제는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오늘은 남처럼 바라볼 수 있는 이 이상한 세계에서, 나는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무던히 지켜내고 있다.






겪어본 적도 없던, 마음껏 사랑하는 시절이 그리웠다.




웹진 취향껏에서 발행된 글입니다.

https://www.chwihyangkkeot.com/writing11_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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