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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원 Sep 29. 2015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

     


따뜻한 봄이 되자 나는 오일장에 가서 수세미와 여주 모종을 사서 사무실 앞 아치형 유리 지붕 아래에 심어놓았다. 모종들이 매어놓은 줄을 타고 올라가 풍성한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리는 상상을 하면서 잘 자라 주길 바랐다. 때가 되자 여주는 작고 예쁜 노란 꽃을 피웠고, 수세미는 아기 손바닥 만 한 꽃을 피워 벌들의 날갯짓이 여간 요란한 게 아녔다.     



“셀 수 없는 양의 돌(stone)이 들어있다'라고 쓰여있네요.” 병원에 갈 시간을 낼 수 없어 결과를 전화로 알려달라는 내게 간호사는 차트에 적힌 대로 말을 전했다. 

한두 달 간 나는 극심한 통증으로 잠에서 깨어 응급실을 세 번이나 갔었다. 아이 낳을 때의 산통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심한 통증을 겪었고 그 통증의 주기는 갈수록 짧아졌는데 아픔은 도둑처럼 밤에 찾아왔다. 체한 증상과 비슷했기에 가까운 중급병원을 갔는데 그 병원 젊은 의사는 '요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느냐'는 질문과 함께 모든 병의 원인은 스트레스에 기인한다며 진통제 주사와 약을 처방해 주었고 신기하게도 거짓말처럼 아픔이 가셨다.  네 번째 통증이 찾아오던 날, 나는 진통제를 입에 털어 넣었고 아픔이 끝나자 도시의 종합 병원을 찾았다. 


    

아치형 유리 지붕이 문제였을까, 벌들은 어찌하여 날아갈 길을 곧잘 잃어버렸다. 벌은 유리천장에 붙어 있다가 사람들이 방충망을 여는 순간을 포착하여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한두 마리라면 잡을 만도 한데 꽃이 더 피어날수록 벌도 많아졌고 행여 불상사가 생길까 사람들은 우선 꽃이 큰 수세미를 없애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아까웠지만 나는 가위를 들고 수세미 맨 아래 밑동을 잘랐다. 



담석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내 경우는 ‘담낭이라는 주머니 안에 들어있어 그것만 떼어내면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연륜 있어 뵈는 의사 선생님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셨기에 적이 안심이 되었다. 담석이란 놈이 내 몸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니... 이만하길 천만다행 아닌 가고 스스로 위로를 했는데 수술할 날이 다가올수록 조금씩 두려움이 스멀스멀 밀려오더라.      



수세미는 일분도 안 되어 잎이 축 늘어졌다. 식물이라 해도 생명인데 제 수명을 다 했으면 좋으련만 밑동을 잘라내며 '미안하다.' 했었다. 그날 오후 내내 영~ 마음이 그랬다. 수세미는 덩굴손이어서 바로 걷어냈다간 매어놓은 줄이 흔들리게 되고 맞은편에 있는 여주도 흔들릴 수 있으니 며칠 기다렸다가 걷어내야지 생각하며....   

    


의사 선생님은 녹색 빛을 띤 0.5m 크기의 돌 한 개와 더 작은 돌 세 개가 담긴 유리병을 주셨다. 내 몸 스스로가 만들어 낸 돌이라니, 신기하기도 하며 그 자그마한 돌들이 죽을 만큼 극심한 통증을 유발했다니 미움 직도 하건만 난 아직  그 돌을 보관하고 있다.   수술 후 며칠간은 병원에 있어야 했고 달리 할 일도 없었기에 종합병원 소망 게시판을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그 게시판에는 병원에 입원한 사람의 가족들이 써놓은 소망의 쪽지들로 가득했다. 할아버지를 걱정하며 연예인을 한 명만이라도 만나게 해달라는 어린 손자의 귀여운 쪽지가 있었고 아픈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끓는 쪽지글과 아버지를 향한 자식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글에는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던, 아름답고 마음 아팠던 소망 게시판....



집에 돌아와 반겨준 것은 아직도 죽지 못한 수세미 꽃이었다. 줄기와 잎은 벌써 노랗게 말라버렸건만 어쩌자고 꽃은 그대로 피어 있는 걸까... 수세미는 영혼까지 끌어올려 사력을 다해 꽃을 피워내고 있었던 것이다. 수세미가 더는 아프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줄을 걷어내었다.



병실에서 좋은 분을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누었고 짧은 병원 생활 중에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다소나마 정리할 수 있게 되어 감사했다. 세상의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쉬지 않고 움직일 테고 숨을 멈춘 것들은 죽음일 것이다. 언젠가는 떠나야 할 날도 오겠지.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애들에게 했던 말 “내 몸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할 그 날이 오거든 얘들아, 생명연장을 위해 애쓰진 말거라.” 했다.      



나는 ‘우아~하게’ 죽고 싶다. 혹자는 ‘죽음 앞에서 우아한 죽음이 어디 있겠느냐, 죽음의 고통에서 어떻게 우아한 죽음이 있을 수 있겠냐’ 하실지도 모르겠다.  나라고 죽음이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만 오래전에 지인 한 분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인공호스를 낀 채 10여 년이 넘게 병상에 계셨다가 끝내 먼 길을 떠나셨다.  자식들은 긴 세월 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로 생채기를 내어가며 상처가 곪아가는 것을 보고 나니 생각이 달라지더라. 

미래를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걱정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밤에 긴 잠을 자고 일어나 내 몸 편안하다면, 가족 중에 아픈 사람 없고 내 한 몸 누울 수 있는 집과 먹을 음식이 있다면 그 보다 더 감사한 일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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