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원 Nov 18. 2015

빈집


2010년 4월 16일

양지바른 언덕에 제비꽃이 피어나고 배꽃이 아름다워 들어선 동네
유달리 새 소리 요란해 둘러보니 빈집들이 많다.



창문이 열려있어 사람이 사는 줄  알았는데 빈집이다.

대문 사이로 들여다본 자목련이 아름답던 집, 이 집의 가족은 다 어디로 떠났을까

이 마을은 널려진 양말도 외롭다.

사람이 그리웠을까? 낯선 이를 보고도 짖지 않는 강아지, 아이들은  지금쯤 학교에 있을 것이다. 널브러진 신발이 정겹기만 하다.

사진을 찍으니 유심히 보시길래 인사를 드렸더니 오라고 손짓하시던 두 할머님,  많이 외로우셨는지 내 손을 잡고 놔주시지 않으셨는데 한 분은 87세 시고 또 한 분은 한 살 아래라 하셨다.  

처음 보는 내게  앉았다가 가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시던지, 참새가 바닥에 잡힐 듯이  종종 대며 놀기에 찍으려니까  날아가버린다.  외로워서 참새들도 부르셨을 듯... 할머님들은 내가 가는 곳을 따라다니셨다. "인자 늙어서 갈 곳이 한 군데밖에 읎어.  나도 젊었을 때가 있었지. 언제 이렇게 많이 묵었나 몰라. 늙기 전에 놀러 많이 댕겨~잉?!"  처음 보는 내게 당신의 손녀처럼 몇 번이나  당부하시며 내손을 꽉 잡고 놓지 않으시던 할머니... 사진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하셨다.  빈집은 늘어만가고 자식들이 많다 해도 저들 살기 바빠 소식도 없지, 친구들은 벌써 떠났거나 죽었다는 소식뿐이고 사람들은 80이 넘었다 하면 사실만큼 살았다고 말하는데 더 오래 살면  안 될 것 같은... '어느 날 저녁밥 잘 묵고 잠 잔 듯이 갔으면  좋겠다.'는 어르신들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그냥 온다는 게 죄송스러워서 꼭 안아 드리다가 기어이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 품이 엄마를 안는 것 같았으니까. 다행히 두 분이 옆집에 사신다니 조금은 덜 외로우실 것 같아 마음이 낫기는 했지만 이제부턴 가방 속에 사탕이라도 넣어가지고 다녀야지~ 생각한다.

돌아보니 아직도 손을 흔들고 계시던 할머니, 그 외로움이 내게도 전달되어 한동안 마이 외로웠다. OTL...



아침 빛이 참 곱던 날...  2015년 11월 15일

파란 기와집에 빨간 감은 어찌나 곱던지

두 할머님이 사시던 그 산동네의 가을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 정갈하고 온기가 있다.


할머님 한 분은 3년 전에, 또 한 분은 1년 전에 먼 길 떠나셨다고...ㅠㅜ 지금은 비어진 집

함께 울고 웃었던 날의 기록들이 남아있는 낙서...

하필이면 비좁은 시멘트 사이에 싹을 틔운 봉선화, 고개를 떨구고  걸어가던 백구 녀석...


높은 지대라서 그러한지 기지국(?)이 서너 개는 되는 듯하던~

작은 산동네에 있던 교회당


아름다운 꽃도 서럽던 마을

면 단위 3개 초등학교를 통폐합하여 만들어진 한 곳의 초등학교 학생 수는 유치원생 포함하여 고작 50명 내외... 농촌의 젊은이들은 아이들 교육을 위하여, 혹은 취업을 하기 위해 모두들 대도시로 떠나버리니 도시의 설 땅은 날로 좁아지고 농촌은 비어만 간다. 자식들이 떠난 고향의 부모들은 연로하시니 홀로 병들어 먼길 떠나시고 나면 그 집은 빈집 된다. 빈집은 일 년 이내에 수풀이 우거져서 흡사 흉가처럼 변하고 만다.


젊은이들이 떠나버린 농촌에는 일손부족으로 인건비가 올라가고 농자재 값도 물가상승률에 따라 오른다. 각종 농산물 수입과 다이어트 열풍, 외식문화의 식생활 변화로 농산물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지금 한창 수확철인 단감은 너무 싸서 인건비도 건지지 못하기에 그대로 방치되는 것은 것을 보았다. 잘 지은 농산물이 어쩌다가 가격이 오른 호재를 만나면 가차 없이 수입부터 하고 보는 정부다.


올해는 태풍이 비켜가서 풍년이라 했다. 산천초목이 고운 단풍으로 물든 이 아름다운 가을에 농민들은 또다시 '아스팔트 농사'를 외치며 서울 거리에 섰다. TPP(환태평양 경제동반자 협정) 가입을 반대하고 한·중 FTA 저지, 쌀값 보장, 밥쌀 수입 중단을 외치며 외로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 나는 지금은 농촌을 떠났지만 1987년 젊고 아름다웠던 그 시절에 농민운동을 했었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뀐 작금에도 변한 것 하나 없는 정부를 본다. 엄청난 물대포 수압으로 사람에 직접분사를 하고도 모자라 쓰러진 힘없는 농민에게 계속 물대포를 발사하여 중태에 빠트렸다. 물대포는 불을 끄는 데 사용하는 것이지 사람에게 쏘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란 말이다.


도시의 많은 사람들의 고향인 농촌~!! 농촌이 고향이고 농민의 자식들인 사람들은 지금 도시에서 살고 있을 것인데 남의 일인 양 앞으로도 여전히 무심할, 무관심한 채로 어쩌면 농업을 천대하며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농민대회가 있는 날이면 곳곳에 교통정체가 심해지곤 하는데 사람들은 농민을 욕하지만 그 교통체증은 평화시위를 외치며 상경하는 농민들을 시위를 하지 못하게 경찰차가 막으며 일어나는 상황이란 걸 아셨으면 좋겠다.


우리는 한국인이고 쌀은 곧 생명이다. 쌀을 지키고 벼농사를 짓는 것은 곧 농지를 지킨다는 의미다.  우리의 농업이, 농촌이, 농민이 동서로 갈라져 있던가?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농민의 자식들은 부모님께 전화 좀 잘하고 밥 잘 먹고 농민의 입장을 곰곰이 생각해보자는 말입니다. ^^v



매거진의 이전글 일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