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선 사슴이 슬픔을 가져가 주는 존재래요. 대신 울어 주는 사람 같은 거."
늦은 여름휴가를 다녀온 그가 내 책상 위에 놓인 책을 보며 말했다. 소설가가 쓴 여행기였다. 작가는 여름 내내 작은 섬에 머물며 글을 썼는데 그곳은 사슴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슬픔을 종이에 써서 매달아 두면 사슴이 그걸 가져가준다고 믿었는데 작은 종이에 쓰려고 한 슬픔이 책 한 권이 되었다고, 작가의 말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생각하면서도 슬픔이라는 단어가 미세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사무실에서 주고받는 생활의 단어들은 게으르지만 날카로웠다. 사람들은 주로 화난다, 짜증 난다, 억울하다, 분하다 같은 말을 썼다. 슬픔은 그 단어들 뒤에 숨어 있다가 늦은 밤 홀로 걷는 골목길에서 얼굴을 드러내곤 했다. 추적추적 발 끝을 적시는 그것을 끌고 들어와 내 방 침대에 앉으면 주르륵 물이 흘렀다.
"도은 씨도 그 작가 좋아하시죠? 저도요. 소설도 다 좋았는데 특히 그 여행기가 좋았어요."
그는 책에 등장하는 그곳에 꼭 가보고 싶었다고 했다. 휴가철이 지난 후라 관광객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여유 있게 섬을 둘러볼 수 있어 좋았다고, 섬을 잇는 다리가 놓이긴 했지만 공항에 내려서도 다시 한참을 버스로 가야 하는 곳이어서 오가는 길이 힘들었다고도 했다. 그리곤 거기서 사온 사슴 열쇠고리를 내밀었다.
"거기 정말 사슴이 많더라고요. 도은 씨도 좋아하실 것 같아서."
"아........"
"도은 씨 글, 참 좋아요. 잘하고 있어요. 여기서 쓰는 방식도 금세 익숙해질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지금 내가 쓰는 글에 나의 문장이란 게 있을까. 나는 매일 조악한 글을 썼고 그마저도 매번 지적을 받았다. 여기저기 쓰레기 더미에서 문장을 골라 근근이 지면을 채우고 있었다. 대학 시절 내내 소설에 매달렸지만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그 무엇도 더 나아질 자신이 없었다. 글에 매달려 사는 시간이 지겨웠는데 흉내 낼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어서 작은 회사 홍보실에 취직한 게 6개월 전이다. 그는 내 사수였다. 그의 글은 회사에서 요구하는 방향을 정확하게 드러내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사보에 실리는 글이라는 게 뻔했지만 결론에 닿는 과정이 섬세하고 따뜻해서 그의 글을 읽는 순간만큼은 나도 잠시 이곳에 희망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으니까.
나는 선물을 내미는 그를 올려다봤다. 그가 그 섬에서 찾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슬픔을 가져가 주는 존재라니.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라니. 볕에 그을린 그의 얼굴이 여름방학을 보내고 온 남자아이처럼 어딘가 깊어지고 서늘해 보였다.
그날도 회식 자리는 2차까지 이어지고 취한 박 부장은 자신의 빈약한 영혼을 증명하려 애쓰고 있었다. 우리는 꼼짝 않고 앉아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폭포수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퍼붓고 싶은 만큼 퍼부어야 자리는 끝이 날 것이다.
"아니 도은 씨는 사람이 왜 이리 재미가 없어. 술자리에서도 이러면 무슨 재미로 사나? 응?"
박 부장이 내 잔에 자꾸 술을 쏟아붓자 그는 박 부장을 달래 데리고 나갔다. 덕분에 우리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술집에서 빠져나왔다. 술집의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가게 앞에 나와 섰을 때 따라 나와 괜찮은지 묻거나, 큰 목소리로 떠드는 무리에서 한 발씩 뒤처지는 내 곁에 그가 서 있던 일을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의 작은 호의나 배려는 적응이 더딘 신입을 챙겨주는, 타고나길 다정한 사람의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는 아내가 있는 남자였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나는 골목 끝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자꾸 돌아본다. 자신을 가장 사랑해 준 사람이 누구예요? 사원 복지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치유 워크숍에서 그 질문을 받았을 때, 그가 지나치게 당황하는 바람에 질문을 던진 강사가 되려 무안해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의 뺨이 귀까지 붉어지다 차차 제자리를 찾아 서늘해질 때까지.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엄마, 할머니, 첫사랑, 강아지를 답하는 동안 속눈썹 아래 그늘로 숨어드는 그의 얼굴을 나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의 슬픔은 어떤 모양일까. 작은 사슴을 만지작거리며 그가 달래고 싶었던 슬픔. 나는 그게 알고 싶어 애가 탔다. 내 몫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골목 끝에 혼자 앉아 있던 그의 등을 쓸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른 아침 빈 사무실에 들어서면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책에 눈길이 갔다. 업무 메시지 끝에 혹여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