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발행인 3]

by 남몰래

1. 이불 쓰기

아주 어릴 때부터 밤이 무서웠다. 방 모서리 끝에 세워둔 긴 옷걸이, 그 위에 걸린 옷들이 귀신의 머리카락이 되었다가 팔이 되었다가 펄럭이는 망토로 변신하는 동안. 창밖 나무 그림자 예측할 수 없는 흔들림을 자꾸 더 커지는 눈으로 바라보면 어떤 손짓인 것도 같아서 얼른 이불을 뒤집어 썼다. 발끝이라도 보이면 들킬까봐 내 몸 전부를 이불 속에 말아 넣고 숨을 작게 쉬면서 잠이 들길 기다렸다. 내게서 나간 숨이 금세 내게로 되돌아 오고 내 온기가 좁은 품 안에서 다시 나를 덥히는. 내 숨만으로 충분한 세계. 일순간에 세계를 차단할 수 있다는 안도감과 이 안에서 살 수만은 없겠다는 낭패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어둠이 밀려왔다 밀려갈 때마다 조금씩 쓸려나가는 모래 알갱이. 허물어진 자리마다 조금씩 드러나는 눈동자.


2. 철봉
철로 만든 봉, 철봉. 방문 사이에 끼워 고정한 철봉. 나는 철봉에 매달린다. 철봉이 내 손을 잡아 끄는 동안 나는 더욱 강력하게 지구의 중심을 향해 돌집한다. 내 몸의 무게가 몽땅 아래로 쏟아지는 순간까지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내가 붙들고 있으면 같이 붙잡아 주는 것도 같지만 내가 손을 놓으면 네가 손을 잡을 리 없다. 사실 너는 그 자리에서 철봉의 철봉만을, 그냥 너만을 충실히 살고 있을 뿐. 내가 네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동안 우리는 특별한 사이인 양 굴었지만 네가 나를 잡아당긴 힘이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 그냥 내가 믿고 싶었던 것일 뿐. 너는 고개를 숙이는 법도, 무릎이 꺾여 주저앉는 법도 없다. 이 벽에서 저 벽까지 곧은 몸을 펴서 버티고 있다. 무언가를 버티는 너는 너대로 억울할까. 팔 내밀어 안아주고 싶어도 그러면 다 무너져버리고 마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까. 그래서 밤낮없이 꼿꼿하게 서 있는게 너도 슬플까. 네게 매달려 버틸 수 있는 시간은 10초가 안되는데. 매달릴 때마다 혼자 용 쓰다 혼자 이별하는게 서글프다. 팔에 힘이 빠져 도저히 안되겠다 싶을 때 네가 나를 잡아주었으면. 내 팔 근육, 허리 운동 다 관두고 그냥 우리 둘이 부둥켜 안았으면. 힘껏 붙잡아도 힘껏 떨어지는 일 뿐인. 그걸 알면서도 다시 힘껏 매달려보는 철봉 놀이. 나를 당겨줘. 내 두 팔을. 너를 따라 날아 오를게. 안될까?


3. 족발 회식
방천시장 가족에 마주 앉아 선생님들의 켜켜이 쌓인 이야기를 아껴 듣는다. 테이블 위엔 살점을 발라내고 남은 족발뼈가 남아 있는데 선생님들의 말이 꼭 하얗게 드러난 뼈 같다는 생각을 한다. 감출 수 없는 것, 삶아도 물러지지 않는 것,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것. 쓴다는 건 뭘까. 받아들이기 힘든 삶 속에서도 끝끝내 놓지 않던 일기장 같은. 무엇으로 남지 않아도 쓰는 순간으로 충분하다는 말씀. 들뜨고 열망했던 내 마음이 무엇을 향한 거였는지 꺼내놓을 말이 없어서 나는 열심히 듣고만 있었다. 순정한 고백들을 한참 듣고 돌아오는 길에는 여름날 긴 낮잠을 자고 일어나 밖은 아직 환한데 태양빛이 어딘가 달라진 것 같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새 키가 큰 것처럼 내 몸이 낯설어지던 오후의 빛. 어쩌면 뼈가 자라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를 순간. 아주 오래 이렇게 사랑하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그런 말을 들은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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