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대본을 쓰라니. 거절할 구실을 찾느라 시선을 돌렸다. 액자 유리에 창밖의 구름이 비쳤다. 구름이 흘러가며 서서히 사람 모양으로 바뀌었다. 두 사람의 모습으로 뭉클거리더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애써 숨긴 것을 내놓으라 하면 누가 내놓겠느냐.’
‘화공님, 그럼 어쩌면 좋습니까?’
‘내 그림을 경매에 내놓고 값은 쌀로 내라고 해라.’
‘예? 화공님 그림을요?’
한 사람이 굽신거린다.
‘그러네요. 화공님 그림이라면 못 사서 안달할 겁니다요. 세자 저하도 못 가져서 안달이지 않습니까? 헤헤.’
구름이 흩어지며 말소리도 멀어졌다.
‘다른 쌀을 내놓으면 어찌합니까?’
‘욕심 많은 자가 좋은 쌀을 내놓겠나. 구휼미는 창고에서 보관하던 쌀이라 빛이 다르다. 그러니 빼돌린 쌀을….’
액자에는 맑은 하늘만 남고, 두 사람도 사라졌다.
구휼미…. 화공, 그림 경매….
이거 말 되는데? 율도국과 그림으로만 통한다는 법은 없잖아? 어쩌면… 아니, 확실해. 내가 이야기를 쓰면 율도국에서도 그대로 진행될 거야!
할아버지의 편지에도 쓰여 있었잖아. 비단강가 불탄 초가에서 찾은 편지에.
- 지민아, 율도국을 지켜다오. 멈추지 말고, 너의 길을 가라. 너만의 방식으로. -
나만의 방식…. 그래, 해보는 거야.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써보겠습니다. 그 암행어사물.”
“진짜?”
부장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진짜 한다니까 함박웃음을 짓는다.
“제목은 구휼미 도난 사건입니다.”
“벌써 제목까지 정했어?”
앞에 앉은 1학년 부원이 돌아보았다.
“응. 평해에 있는 관리들이 구휼미를 빼돌렸거든. 정 화공이 세자의 밀명을 받고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이야.”
“재미있겠다.”
“벌써 거기까지?”
부장은 스케치를 보며 싱글거렸다. 지난번에 실수해서 잘못 건넨 그 스케치이다. 뾰족하게 올라간 눈초리가 둥글게 내려왔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 써오겠습니다.”
“그렇게나 빨리?”
주말이 끼어있어서 월요일이라고 했지, 더 서두를 작정이다. 내가 빨리 끝내야 율도국의 사건도 빨리 해결된다. 여기서 하루는 그쪽에서는 닷새이다. 하루 늦어지면 열흘 넘게 차이가 난다.
“좋아. 그렇게 하자. 시간이 별로 없어. 원고는 연습하면서 손보기로 하고.”
드디어 지루한 회의가 끝났다.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1학년 부원들이 속삭였다.
“불똥 튈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다행이다.”
“난 글짓기가 제일 어려워. 아우.”
깔깔거리며 휘파람까지 분다. 나도 글짓기 엄청 싫거든!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다. 내가 써야만 구휼미 사건이 해결될 테니까.
그걸 무대에 올리면 율도국의 역사를 여기서도 알게 되는 거지. 그게 어디인지 모르면서도 아무튼.
언젠가 연암대군이 말했다. 소망은 이루어진다고.
‘백성의 마음이 먼저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바라면 못 이룰 것이 없어. 그들의 소망이 우리에게 길이 된다.’
내가 그림 속으로 소환된 것도 율도국 사람들이 현덕 대사를 기다린 덕분이다. 연암대군, 조금만 기다려. 구휼미를 찾아줄 테니까.
우선 율도국 평해가 어떤 곳인지 알아야 한다. 할아버지의 창고부터 뒤져봐야지.
모니터 앞에 백룡의 붓을 내려놓았다. 하얗던 붓대가 누렇게 변했다. 기운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퇴원하고 처음 서랍을 열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한동안 율도국에 못 가겠다. 붓의 기운이 채워져야 다시 갈 수 있겠어.
“내가 강해져야 백룡도 강해진다.”
누런 붓대에 손을 얹었다. 옥이 하얗게 돌아오면 문이 열릴 거다. 그때까지 율도국을 도울 다른 방법을 찾았어.
작은 까마귀 인형도 모니터 옆에 놓았다. 여전히 인형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시끄럽게 깍깍거릴 때는 귀가 따가웠는데, 조용하니까 더 이상하다. 그래도 걱정 없다. 때가 되면 또 떠들어댈 테니까.
창고에서 할아버지의 노트도 찾아냈다. 이십 년 전의 평해이기는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신분이나 재산은 집안 대대로 이어지니까.
대본에도 율도국의 정확한 지명을 쓸 것, 반드시 ‘내가’ 들어갈 것. 이것이 필수 조건이다.
할아버지도 그림 그릴 때, 이정표와 사람을 꼭 그려 넣었다. 콩알만 하게 그려 넣어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확실하다. 그 사람이 바로 할아버지였다.
그 지역의 대표 인물이나 특산물, 명소가 들어가면 더 선명해진다. 그렇게 내 대본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아홉이다.
세자의 밀명을 받은 정 화공, 이게 바로 나다. 나를 도와줄 하인 방자가 있다. 평해를 관할하는 수령과 구휼미를 빼돌린 공범이 두 명이다. 최 진사와 이 대감.
수령을 돕는 포졸이 두 명, 배고픔과 억울함을 호소하는 마을 사람이 두 명. 마을 사람은 그림 경매도 도와준다. 명소와 특산물은 대사 속에 집어넣으면 된다.
준비가 끝났다. 저녁을 먹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았다. 비단강에서 보았던 마을과 읍성의 모습을 자세히 떠올렸다. 평해도 그와 비슷할 것이다.
시작은 평해 관아 앞이다. 마을 사람들이 하소연하고, 정 화공과 방자가 범인을 잡기 위해 고민한다.
‘정 화공님, 어쩌시려고요?’
‘내가 왔다고 소문을 내라. 내 그림을 가지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등장인물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니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채워졌다.
부자들은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며 재산을 빼앗고, 수령은 눈감아주는 대가로 뒷돈을 받고 있다. 수령은 한성에서 사람이 왔다니 걱정한다.
‘한성에서 왔다고? 무슨 꿍꿍이인가?’
구휼미에 대해서는 발뺌하던 수령과 부자들은 정 화공이 왔다는 얘기를 듣고 그림을 훔칠 계획을 세운다.
최 진사와 이 대감은 서로 자신이 좋은 그림을 가지려고 신경전이다.
‘정 화공의 그림이란 말이지? 왕족들도 탐내는 물건 아닌가!’
‘경매에서 쌀만 받는다고? 어쩐다… 그래도 새 쌀을 내놓기는 아깝지.’
그림 경매는 어려운 백성을 위한 기금 마련이 목적이다. 묵은쌀을 내놓은 수령과 부자들, 마을 사람들의 증언, 창고에서 나온 쌀가마니를 증거로 정 화공은 구휼미 사건을 해결한다.
‘화공님, 어사출두는 안 하십니까요?’
방자는 역졸들을 이끌고 의기양양 뽐내고 싶어한다. 그렇게 어사출두도 끝내고, 마지막에 정 화공의 주장도 써넣었다.
‘나랏돈을 빼돌리는 자가 있으니, 안타깝구나. 백 가마에서 열 가마를 가로채는 건 눈에 띄지만, 천 가마에서 열을 빼면 보이지 않는다. 백성들의 피를 빨아 사사로이 욕심을 채우니 어찌 관리라 할 수 있는가?’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고, 등장인물이 알아서 말하니 옮겨 적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신없이 써 내려갔다.
벌써 날이 밝았다. 창문으로 향기로운 바람이 들어왔다. 다른 날과는 달리 꽃향기가 섞여 있다. 율도국의 일이 해결되었구나.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모니터 앞에 놓았던 백룡의 붓도 조금 밝아진 것 같다.
일단 사건을 해결했으니, 현실에서의 대본은 수정해도 상관없다. 주말 내내 고치고 또 고쳤다. 안 하면 몰라도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야지.
‘이 소식을 연암대군도 들었을까?’
대본을 읽을 때마다 연암대군, 무영이 보였다. 함께 다녔던 곳도 생생했다. 궁궐, 저잣거리, 비단강. 손에 잡힐 듯 또렷했다. 기다려. 언젠가 다시 만날 테니까.
글짓기 싫어하는 내가 대본을 쓴 것도, 그 글 때문에 상담실에 앉는 것도 처음이다. 연극 공연에 대한 회의를 왜 하필 상담실에서 하냐고. 다시는 안 들어간다고 다짐했는데, 몇 달 만에 또 상담실이다.
그래도 예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책상과 의자뿐인 방은 똑같은데, 그때와는 달리 밝고 아늑해 보였다. 차를 따라주는 담임도 왠지 더 친절하게 느껴진다. 동네 아저씨 같기도 하고.
연극부장은 차를 홀짝거리며 대본을 넘겼다.
“재밌다. 정지민, 너 재능 있는데?”
“조금만 수정하면 되겠어. 그런데, 진귀한 그림은 어떻게 하려고?”
담임은 그림 경매 부분이 재미있다며 경매 장면부터 펼쳤다.
“실제 종이에는 굵은 선만 그리고요, 배경 스크린에 영상을 보여주려고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나 날아오르는 새요. 짤 만들어주는 앱 많아요.”
담임이 턱을 긁적이더니 읽던 대본을 내려놓았다.
“그거 좋다. 학생 작품답게 직접 그리면 좋겠어. 저작권 있는 거 잘못 쓰면 안 되니까.”
“예.”
간단한 영상은 어렵지 않다. 게임 그래픽처럼 정교한 것도 아니고 수묵화 느낌만 살리면 되니까 스캔해서 필터 쓰면 된다.
연극부장이 까르륵거렸다.
“그림 읽는 정 화공…. 이거 너지? 하하.”
“예. 그렇죠.”
연극부장은 프린트를 들고 일어났다. 나도 따라 일어서는데, 담임이 손을 들었다.
“지민아, 넌 잠깐 나 좀 보자.”
아우, 또 무슨 말을 하시려고. 담임이 지목하면 가슴이 쿵쾅거린다. 아무 잘못이 없어도 거리에 경찰들이 서 있으면 왠지 긴장되는 것과 똑같다.
연극부장이 나가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담임이 내가 그린 스케치를 꺼냈다. 하여튼, 부장은 남의 그림을 여기저기 안 내놓는 곳이 없다.
“얘기 들었다. 너희 할아버지. 그 사고 때 사람들을 구하고 돌아가셨다고.”
“그러셨죠.”
왜 갑자기 할아버지 얘기를? 당황스럽다. 어쨌든 야단치는 건 아니니 안심이지만.
“내 형님도 그분 덕에 살아나셨거든. 진짜 영웅이셨어. 정말 고마운 분이다.”
“예. 저도 할아버지 존경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담임은 내 그림을 한 장씩 열어보았다. 그림을 보면서 미소도 짓는다. 이러면 불안한데….
“미술 선생님께 얘기했더니 당장 미술부로 오라고 하더라. 대회 나갈 실력이라고.”
“선생님, 저는….”
“도망친다고 해결되는 건 없어. 언제까지 도망 다닐 거냐? 널 괴롭힌 녀석들, 콧대를 꺾어줘야지. 주먹이 아니라 실력으로.”
담임은 스케치를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썩히기에는 아까운 재능이다. 안 그러냐?”
그림… 그리고 싶다. 지금보다 훨씬 잘 그리고 싶다. 율도국을 그릴 때도, 백룡의 붓을 휘두를 때도 머릿속에 또렷한 형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많이 보고, 그리는 수밖에 없다.
그림은 내 꿈이기도 했다. 썩은 나무 같은 녀석들에 걸려 주춤거렸지만, 아직 괜찮잖아? 나한테는 시간도 많다.
“예. 알겠습니다.”
마음은 힘에 가득 찼지만, 고개는 천천히 끄덕였다.
연극부에서 첫 연습을 시작했다. 그동안 반대하던 선배들도 이번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모두 그림 경매 부분이 재미있다고 했다. 정 화공이 사람들 앞에 서서 그림을 읽어주는 장면이다.
‘눈밭에 외로이 서 있는 나무는 선비의 처지를 보여줍니다. 여기 이 가시밭은 불안한 시대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선비는 앞날의 햇빛을 꿈꾸고 있죠.’
이 책 저 책에서 조금씩 베켰는데, 재미있다니 다행이다.
내가 쓴 대본을 외우고, 연습하니 너무나 뿌듯했다. 소품 담당이라 무대에는 나가지 않지만, 나도 배우가 된 것처럼 가슴 설렜다.
끝나자마자 창고로 뛰어갔다. 할아버지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제가 또 율도국을 구했어요.”
창고에 있으면 할아버지의 숨결이 살아있는 것 같다. 모든 일이 잘될 거다.
그사이 창고도 깨끗하게 치웠다. 율도국에 다녀온 다음부터 매일 조금씩 쓸고 닦고 물건을 정리했다.
현관에 있었던 그 커다란 그림은 아직 못 찾았지만, 백룡의 붓은 거의 하얗게 돌아왔다. 새하얗게 돌아가려면 더 기다려야겠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감각으로 알 수 있다.
‘연암대군. 기다려. 내가 도와줄게.’
다음에 만날 때는 나도 더 근사한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지금 나는 최선을 다해, 아주 열심히 살고 있거든.
이번 여름은 빨리 지나갈 것이다. 연극대회 준비하고, 미술부까지 나가면 시간은 금방 간다.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 율도국에서 신호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