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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Jan 14. 2021

결혼할 여자가 박씨만 아니면 돼


할머니께서 여차 마을에 혼자 사신 지도 오래 되었다. 올해로 할머니는 87세이신데 어른들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이 오락가락 하신다. 아들 딸들이 제사나 생일 때문에 내려온 것을 설날로 착각해 그 많던 냉동 생선을 모조리 해동시켜버리거나, 밥을 한 시간 전에 지었다고 해서 밥솥을 열어보면 취사 버튼을 안 눌러서 쌀뜨물이 그대로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요즘엔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야기를 부쩍 많이 하신다.



- 내 영감한테 시집 와서 귀염 많이 받았다!



큰아버지와 우리 가족이 할머니 댁에 있을 때 할머니는 갑자기 대뜸 저렇게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듣자 내가 본 한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할머니가 할아버지 세수를 시키기 위해서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데 얼굴을 닦는다기 보다는 거의 뺨을 때리는 수준으로 물수건을 (경상도 말로) 문땠는데 할아버지가 소리를 지르고 그랬다.



- 와이라노, 와이라노!


- 마 가만히 있으소.



내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막고 웃으면 할아버지는 굉장히 멋쩍은 표정을 짓다가 다음날이면 또 그 수모를 당했다. 내가 본 모습은 다 그와 같은 것이라서 할머니가 귀여움을 많이 받는 신부라는 느낌을 받은 적은 한번도 없다. 할머니는 귀여움 받는 신부라고 하기엔 할아버지를 많이 때려잡는 스타일이었다. 근데 큰아버지가 웃으면서 거기서 이렇게 대답하시는 거다.



- 그럼 11살이나 어린데 귀여움 받아야지요.



...네? 난 할머니가 11살이나 어린 신부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할아버지, 이제 보니 완전 도둑이시네요. 그런데 옛날 할아버지들이 술주정에, 가정 폭력에, 여러 집 살림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는 걸 성인이 되고 나서야 알았기 때문에 할아버지를 '순이 마음을 훔친' 도둑으로서 명예 승격 시켜주기로 했다. 할아버지는 가정 생활에 있어서는 별 문제가 없었다. 한 가지 문제라고 한다면 주민 모두가 어부이거나 해녀인 이 바닷마을에서 배멀미가 심해 혼자 돈도 안 되는 농사를 지었다는 것인데, 이를 두고 아빠는 '느그 할아버지 사람은 좋다. 돈을 못 벌어서 그렇지' 정도 선에서 정리했다.



본인이 도둑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할아버지는 아빠가 결혼할 여자를 데려오겠다고 했을 때 더도 덜도 말고 딱 하나만 물었다.



- 어느 가(家)고?


- 조씨 입니더.


- 박씨만 아니면 된다.



김명실 할아버지에게는 아무도 공감하지 못하는 혼자만의 믿음이 있었다. 일명 '믿거박'이라고, 믿고 거르는 박씨라는 뜻인데  신앙의 기원은  옛날 여차 마을에 같이 살았다던 박씨 할아버지다. 김명실 할아버지가 '박씨'라고 불렀다던  할아버지는 커다란 안경알 뒤에서 눈을 부라리며 동네 사람들의 이모저모를 면밀히 숨어 살피던 인물이었던  같다. 지금으로 따지면 박씨는 프로불편러에 프로신고러였던  같은데  당시 관습으로 유야무야 넘어갈  있었던 것도  집어내 문제 삼았기 때문에 사람들과 갈등이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산에서 나무를 해서 땔감으로 쓰던 시절이었는데 어느 즈음부터 국가에서 산에서 나무하는 것을 금지했다. 하지만 다른 연료를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몰래 이전처럼 나무를 해다가 땔감으로 썼다. 평소에도 긴장감이라곤 하나 없이 사는 김명실 할아버지는 당연히 살던대로 살았고, 어느날 경찰이 집으로 찾아왔다.


할아버지는 그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벌금으로 내며 분통을 터뜨렸고 철두철미하게 이를 신고한 박씨는 신고 포상금을 받았다. 그 일로 김명실 할아버지는 박씨 할아버지와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그 이후로도 박씨는 마을 사람들과 이래저래 다툼이 많았다. 그런 일이 한 두개가 아니었는지 우리 아빠조차도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박씨 성을 가진 사람과는 상종을 말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고 살았다. 하지만 가족들 중 아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할아버지에겐 믿거박만큼이나 황당한 믿음이 하나 더 있다. 박씨가 아닌 덕분에(?) 인사를 드릴 수 있게 된 엄마는 여차마을에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면서 초면에 어처구니없는 말을 또 들었다. 할아버지는 평소처럼 별 말이 없다가 갑자기 대뜸 이런 말을 했다.



- 김미숙이 닮은 며느리면 얼마나 좋겠노.



여기서 김미숙이란 그 당시 한창 이름을 떨치던 탤런트 김미숙 씨를 뜻한다. 초면에 인사하는 자리에서 그 말을 들은 엄마는 순간 '멍'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명예 도둑이 아니라 진짜 도둑이 맞다. 양심이 있어야지요. 요즘 같았으면 바로 결혼 파토날 수도 있을만한 발언이다. 며느리가 시가 어른들께 인사 드리러 왔더니 시아버지가 한다는 말이 '연예인 누구를 안 닮아서 아쉽다'라니? 엄마가 성격이 좋아서 넘어가줬지만 그 이후로도 할아버지는 김미숙 타령을 계속 했다. 그래서 나중엔 며느리 삼고 싶은게 아니라 사실은 본인의 이상형이 김미숙이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을 하기도 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땐 엄마도 할 말을 했다.



- 김미숙이 닮은 며느리면 좋겄네.


- 아버님, 양심이 있어야지예. 아들 상태를 보이소. 김미숙이 데리고 올 수 있겠습니꺼?


- .............



어쩌면 할머니는 처음 시집 왔을 때까지만 해도 11살 연하의 귀여운 어린 신부가 맞았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미숙 타령이나 박씨만 아니면 된다는 신앙을 보면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도 말도 안되는 고집을 피웠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제는 좀 이해가 된달까. 할아버지가 '와이라노, 와이라노!'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할머니가 조폭 마누라처럼 눈하나 꿈쩍하지 않고 제압하게 된 사연을. 할아버지, 명예 도둑은 다시 생각 좀 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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