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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Jan 16. 2021

숨어서 먹는 공짜 치킨이 더 맛있다


망할 놈의 바이러스 때문에 1년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모두가 경제적,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에 끝없이 시달린다. 암담한 나날이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다는 것에 한숨을 쉬지만 사회가 한 순간에 이렇게 바뀔 수 있다는 점은 놀랍기도 하다. 그런 날이 오긴 오겠지만 우리 때는 아니겠지, 라고 생각한 것 중 순식간에 현 세대의 문화로 정착된 것들이 많다. 화상 수업, 화상 회의, 재택 근무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직장인이 가장 환영하는 변화는 재택 근무보다도 (사실 일하는 것은 직장에서 하는 게 내 경험 상 훨씬 편했다.) 회식이 없어졌다는 점이 아닐까.


아빠 회사에서도 모든 회식은 다 취소되고 대신 그 돈으로 개인당 쓸 수 있는 쿠폰을 여러 개 지급했다. 아무데서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소상공인들을 돕기 위한 취지로 회사가 지정해 놓은 인근 매장에서만 사용 가능하다. 쿠폰 여러 개 중에서 나와 김지영이 가장 눈독을 들였던 것은 2만원 짜리 치킨 쿠폰이다. 그것도 무려 2장! 아빠 회사는 우리 집에서 차로 3-40분을 가야하는 다른 시에 있지만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우리는 단지 치킨을 먹기 위해서 멀리 원정을 떠났다.


치킨을 포장 주문하고 가게 밖 벤치에서 기다리는데 엄마가 말했다.



- 아이고, 세상이 이리 달라졌다. 회식 대신에 치킨먹으라고 쿠폰을 주네.



그 말을 하는 엄마는 뭔가 과거의 향수에 젖은 듯 이야기 했지만 나와 김지영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 개꿀이죠.


- 누가 회식을 하고 싶어해요?



20대 입장에선 회식을 안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환영인데 심지어 가족 혹은 홀로 먹으라고 치킨 쿠폰까지 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하지만 엄마는 회식을 그래도 해야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우리의 일심동체 반응을 보고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기름 냄새를 맡으며 고통스럽게 기다리다가 치킨이 나오자마자 두 박스를 들고 차에 탔다. 생각해보니 우린 원정을 나왔으므로 집에 가기까지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어디 먹을 데도 딱히 없다. 치킨을 먹기 위해서 굳이 차를 타고 3-40분 걸려서 온 것도 이례적인 일인데 치킨을 받아도 먹을 곳을 찾아 전전해야하는 하이에나가 된 것이다. 기름 냄새를 맡으며 괴로워 하던 나와 김지영은 투덜거렸다.



- 치킨을 받아도 어디서 편하게 먹지도 못하고 무슨 이런 개같은 세상이 다 있어요?



근데 이걸 어디서 먹냐는 김지영의 질문에 아빠는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바닷가 공원에 가자고 했다. 노을질 무렵의 풍경이 예쁘기로 유명한 곳이다. 아빠 말대로 5분도 채 되지 않아 바닷가 공원에 곧 도착했다. 사실 이 곳은 공원이라기 보다도 주차장에 가까운 곳이다. 하지만 그냥 삭막한 주차장은 아니고 자동차 극장처럼 사람들이 차를 몰고 와서 앞의 탁 트인 바닷가 전망을 구경하는 곳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전에 이 곳에 올 때는 차가 빼곡히 있었지만 지금은 텅 비었다.


풍경이고 뭐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므로 아빠가 차를 주차하자마자 우린 치킨 박스 포장을 뜯었다. 하지만 차 안이라 어떻게 나누어 먹어야 할 지 잠깐 고민이 되었다. 아빠는 '밖에 나가서 돗자리를 펴고 먹을까?'라고 했지만 나와 김지영이 단칼에 거절했다. 요즘같은 세상에 어떻게 밖에 나가서 4명이 치킨을 먹어요. 치킨 두 마리를 앞에 두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못 먹을 대한민국 사람은 없으므로 어떻게든 나누어서 먹기 시작했다.


기다린 보람만큼 치킨은 근래 먹은 것 중 제일 맛있었다. 머나먼 길을 떠나온데다 먹기 위한 기다림이 배가 되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족 모두가 '너무 맛있다'를 남발했다. 비록 부스러기가 떨어져서 서로 핀잔을 주거나 부주의한 내가 치킨무 국물을 엎질러서 욕을 먹는 동안에도 이 상황 자체가 너무 웃긴지 다들 어이없다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하필 우리 옆에 주차된 차량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운전 면허 연습을 하는 분이셨다. 운전면허 강사가 소리치는 것이 우리한테도 들렸다. '어이!' '빨리 빨리!' '스톱! 스톱!' 이런 말들인데 우린 왠지 그 말에 눈치가 보여서 킥킥 웃으면서 머리를 숙였다.


오늘 남은 치킨 몇 조각을 데워 먹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지만 어제보다 맛이 훨씬 덜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간이 지나서 맛이 없어진 건가? 그런 것도 있겠지만 '숨어서' 먹고 '공짜로' 먹는다는 스릴이 가미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사진은 우리가 숨어서 공짜 치킨을 먹던 바닷가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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