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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Feb 28. 2021

엄마도 이젠 어머니가 싫다


'엄마' 대체할 다른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편하고 쉬운 단어다. 엄마를 대체할 단어는 어머니 하나 뿐인데 엄마와 어머니의 어감이 사뭇 다르다는 을 한번이라도 문제삼아 본 적 있는가? 일상에서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라고 보는데,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어머니란 왠지 숭고한 의미를 한층 더한  고 이 이야기는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한없이 자애롭고 아낌없이 희생하고 나누어줄  같은 이미지의  단어자신의 불효를 뼈저리게 후회하거나 회개하는 연속극 장면과   우러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요즘엔 4인 가족이 오랜만에 모여도 외식 한번 하는 게 그리 어렵다. 누구는 이거 먹자, 누구는 저거 먹자, 누구는 시켜먹자, 누구는 이거 어제 먹었다. 아빠는 늘 여자 3명 취향 맞추기가 너무 어렵고 여자 3명이 씻고 나갈 준비를 하면 하루 해가 다 간다며 툴툴거리는 사람이다. 무엇을 먹을 것이냐는 우리들의 논쟁에 아빠는 일찌감치 질려버렸는지, 너희 먹고 싶은 거 너희 마음껏 먹고 오라며 자긴 집에 있겠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각자도생인지라 누구 한명이 빠진다고 해서 분위기 망치게 왜 빠지냐며 굳이 끌고 가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래요? 그럼 쉬세요, 라고 말하고 기꺼이 보내드린다. 엄마는 아빠가 텔레비전 앞에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것을 보고 피곤해서 안 나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연속극을 보려고 그러는 거라고 했다.


아빠가 모처럼의 외식을 포기할 만큼 재밌는 드라마가 최근에 있었던가? 텔레비전을 보니 딱 봐도 화질이 매우 나빠보이고, 지금은 중견 탤런트인 분들이 탱탱한 피부결을 자랑하고 있는 옛날 드라마다. 오른쪽에 약 4회분을 연속 방송한다는 문구가 적혀져 있다. 이름부터가 온 세월을 정통으로 관통한다. 요즘엔 아예 사라져서 이젠 어색하기까지한 '아씨'가 드라마 제목이다. 이제 그 호칭을 찾아볼 수 있는 건 불후의 명작 <작은 아씨들> 말곤 없는 걸로 아는데.


사람의 취향은 크게 봤던 것을 또 보며 추억에 잠기는 쪽과, 한번 본 것은 절대 보지 않고 늘 새로운 것을 찾는 쪽으로 나뉜다. 엄마가 '아씨'를 보기 위해 대기를 타는 아빠를 보고 궁시렁거린 건 본인이 그런 쪽이 아니어서겠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엄마는 문제의 그 드라마에 대해서 할 말이 있었다.



- 내 그 드라마 내용 안 봐도 훤하다.


- 저 드라마 봤어요?


- 안 봤다! 안 봐도 내 무슨 내용인지 다 안다.



내가 무슨 내용인데요, 라고 물어보기도 전에 엄마는 드라마 '아씨'의 내용(일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 먼저 남편이 바람을 피우겠지.



내가 물음표 가득한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는데, 엄마는 내가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를 빨리 전개시킨다. 엄마는 아주 담담한 어조로 대답 없는 나홀로 관객을 위해 독백을 시작한다.



- 남자가 밖에서 낳아온 자식을 가슴으로 키우고.


- 그 와중에 시어머니한테 구박 받아가면서.


- 어려운 살림 일으킨다고 또 쌔가 빠지게 일을 하겠지.


- 그러다가 나중에 불치병 걸린다? 평생을 고생 했으니 곱게 죽지도 몬한다.



나는 엔딩까지 내버린 엄마를 보고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엄마는 옛날 드라마를 다시 보는 아빠의 취향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엄마는 드라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중이었고, 더 정확히는 드라마에서 투영된 '여자'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자조섞인 어투로 말했다.



- 아주 대—단한 현모양처 나셨다, 정말.



엄마는 사회에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왕이면 좋게 해라, 항상 긍정적으로 해라, 와 같은 말로 화가 많고 거침없이 욕하는 나와 동생과 부딪칠 때가 많다. 나와 동생은 염세주의자는 아니지만 이 개같은 세상을 왜 굳이 아름답게 바라봐 주려고 해요? 라고 외치는 현실주의자들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 대한 엄마의 거침없는 브리핑을 듣고 있자니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사회에 불만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불만을 표출할 기회조차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엄마가 대-단한 현모양처 나셨다며 나열한 일련의 스토리들은 사실 가공한 것도 아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누구나 어디에서나 들어봤을법한 이야기다. 당장 나만해도 남편이 바람이 났고, 어머니가 가정 폭력을 당했고, 가정 살림을 모두 도맡아 하는 가운데 경제적 책무까지 버린 남편 대신 일까지 해야 하는 어떤 이들을 직접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깨달았다. 엄마는 드라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구나.


우리 세대에선 그런 이야기를 두고 막장도 그런 막장이 없다고 말하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고 하겠지만 아마 엄마 세대에선 아닐 것이다. 놀랄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막장 스토리는 더더욱 아닐만큼 현실엔 기가 막힌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엄마는 이젠 화가 났다는 듯이 그 때까지도 듣고만 있던 나에게 톡 쏘았다. 난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엄마는 내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 여자가 찍싸게 고생만 하다가 늙고 병들어서 죽는 내용을 도대체 왜 봐야 되노?



엄마는 머플러를 두르고 외투를 입었다.



- 요즘같은 세상에선 나올 수도, 나와서도 안되는 드라마다.



엄마의 옷차림은 동네의 그 누구보다도 수수했고 그걸 보니 나는 엄마가 자기 자신을 위해 돈을 마음껏 쓴 적이 거의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엄마는 아씨처럼 온갖 고초를 다 겪은 주변 여자들과 자신의 신세가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언제나 행복한 우리 가족을 누구보다도 든든히 지킨 그녀이지만, 그건 단지 내가 엄마를 '어머니'로만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만 그런 건지 알 수가 없다. 한 인간으로서, 한 여자로서 엄마가 무엇을 포기하고 또 희생해야만 했는지 난 평생 안 적도 없고 실은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 이제 나는 그런 이야기 안 보고 싶다. 가자, 파스타 먹으러.  



엄마는 요즘같은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그 시대 어머니의 모습이 집 안에 울려 퍼지는 것을 거부한다는 듯이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엄마의 손을 잡는데 더이상 이런 구속과 속박에 매인 채로 살지 말라는 간절한 소망에 붙들린 것 같았다.



*엄마와 외식하러 가던 날의 기억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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