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숲이김 Nov 23. 2021

에듀윌이 뭐냐고 묻는 할아버지


1.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한 할아버지께서 내게 학생이냐 물었다. 나를 학생으로 봐주신다는 것에 큰 기쁨을 느끼는 것 자체가 노화의 증거인 것 같지만 뻔뻔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2.

그러자 할아버지는 지하철 전광판을 가리키며 ‘에듀윌’이 무슨 뜻이냐 물었다. 그는 자기가 저 단어를 볼 때마다 영어 사전에 찾아본다는 것을 늘 깜박한다고 했다.


3.

그가 지금의 나이에도 영어 사전을 찾아보며 산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긴장이 되었고, 더 잘 대답해드리고 싶었다.


4.

나는 영어 사전에 찾아도 저 단어는 아마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학원 이름이에요. 이것 저것을 다 가르치는.


5.

그는 에듀윌에 나이든 사람을 위한 강좌도 있는지 물었다. 내 느낌엔 없을 것 같았고, 가르친다고 광고한 강좌들도 청년이나 장년을 위한 것 같았지만 나는 아마 있을 것이라고 힘주어 대답했다.


6.

그는 요즘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고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며, 요컨대 얼마 전에 갔던 좋은 곳을 말해주려 했지만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지 한참을 그… 그… 거렸다.


7.

지하철이 왔고 우리가  칸에는 좌석이 많았다. 그 중 하나에 나는 앉았지만 그는 웬일인지  앞에 손잡이를 잡고 섰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다산 정약용!’ 하고 외쳤다. 얼마 전에 갔던 좋은 곳이 정약용과 관련된 곳인데 이제 생각났다며.


8.

그는 난 여기 살아요, 하고 두 역만에 내렸다. 나는 그의 흰 피부와 포동한 눈두덩을 보며 인사를 했다. 그가 떠난 자리엔 풋사과 향기가 남았다.



* 사진은 롯데뮤지엄의 ‘dreamer, 3:45am’ 전시에서. 꿈꾸는 자들의 새벽은 뿌옇지만 설렌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빠의 유투브 플레이리스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