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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경 Feb 21. 2019

"언니, 나 너무 힘들어..."

<내 남자의 적나라한 민.낯.>을 읽고

스무 살, 대학생이 돼서 첫 연애를 시작했던 막내 동생에게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언니…. 나 너무 힘들어….


밤 열 두 시였다. 잠잘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일어나 앉았다.

그 몇 초 사이에 직감한 불안 때문이었다.

“왜, 무슨 일이야?”

막내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서 두려움이 묻어났다.

제발, 차라리 슬퍼서 전화한 것이기를 바랐건만 아니었다.  

“걔가 계속 집 앞에 찾아와. 현관문을 계속 두드리면서 빨리 나오라고 욕하고….”  

요동치는 내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얼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다툼이 잦아서 헤어졌다 사귀었다를 몇 번이고 반복했던 그 불안정한 연애의 끝이 결국 이렇게 된 것이다.    

“아씨…. 미친놈이네!!! 지금도 거기에 있어?”

흥분한다고 될 일이 아니란 걸 알았기에 이후 차분히 숨을 고르려고 애썼다.

나는 의연해야 했다. 차분함을 유지해야 했다. 200km 멀리 떨어져 있는 내 동생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야 했다. 그런데, 자꾸만 며칠 전에 뉴스에서 봤던 이별 범죄 사건이 떠올랐다. 헤어진 전 여자 친구와 그의 부모까지 살해했다는 흉악범죄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제발, 제발. 그런 일만은 제발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제발요.’

누구에게 빌었는지도 모르게, 애걸복걸 속으로 ‘제발, 제발.’ 몇 번이고 읊조렸다.      


과한 걱정이었을까. 다행히도 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날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건너 들려오는 목소리에 의존해, 모든 상황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던 그날의 사건. 경계하고, 또 경계하며 마음을 주고받는 관계를 시작했던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었다. 남자에 대해서 잘 알 리가 없는 동생은 (그렇다고 내가 잘 아는 것도 아니지만) ‘널 좋아해.’란 말에 쉽사리 설레어했고, 연인 관계를 쉽게 시작했다. 그래서 미숙할 수밖에 없는 첫 연애의 끝이 보다 싱숭생숭 했던 것을 누구 탓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저 분명한 것은, 나는 막내 동생이 ‘건강한’ 연애를 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것이다. 좀 더 솔직하게, 내 동생이 남자와의 관계에 있어 ‘피해자’도 ‘가해자’도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오랜만에 집에 온 막내에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남자 입장에서 직접, 남자의 민낯을 들추려 한 목적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남자들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혹시 모를 위기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받거나 괴로워하는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조금이라고 막아보기 위해서다. 글을 써 내려갈 때 가장 염두에 뒀던 점 역시 (…) 현실적인 남자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 점에 있다. (…) SNS 상의 편집된 이야기들과 일차원적인 이미지들에 익숙해져 있는 당신이라면 그래서, 조금 불편할 수 있는 진짜 남자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7쪽).” 이건 내가 할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동생에겐 정말 필요했다. 건네받은 책을 한참동안 숨죽여 읽던 동생은, 조금 놀란 눈치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적나라한 남자들의 속내를 처음 접한 것이다. “이쁜아. 오빠, 믿지?” “오빠는 너만 영원히 사랑할거야.” “세상 남자 다 그래도 오빠는 절대 안 그래.”라는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나의 과오를 답습하지 않기를.


     


이 빨간 책은 일부 남자들이 성관계를 영상으로 찍고 싶어 하는 이유, 헤어지자는 연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의 심리, 그들이 ‘합의된 관계’라고 판단하는 기준 등의 문제적 남자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한 남자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직면하면서 겪는 성(性) 성장기도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에로티시즘과 번식 욕구를 구분하지 못한 누군가의 혹시 모를 위협으로부터 내 아내와, 태어날 내 자식들, 그리고 내 가족들과 이웃들을 지키기 위해 나는 내가 먼저 나서 이러한 에로티시즘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공론화될 수 있도록 앞장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는 나 자신의 치부까지를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에로티시즘을 세상에 알리기로 한 것이다(108쪽)." 예상외로 꽤 의미 있게 읽혔다. 내가 언제부터 성적 욕망을 느끼기 시작했고, 나는 이를 어떻게 직면하고 받아들였는지 처음으로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도 저자처럼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고 무엇보다, 내 성적 욕망을 철저하게 감추어야만 하는 줄 알았다. ('아무 것도 몰라요' 시절의 이야기를 적다보니 글이 너무 길어져서 한참을 다시 지웠다.)  



각자의 욕망에 솔직해지기


<내 남자의 적나라한 민.낯.> 이라는 제목과 빨간 색감이 불편하면서도 끌렸다. 괜히 훔쳐보고 싶은 느낌을 준 것이다. 이런 솔직한 이야기들이 더이상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날이 오길 바란다. 훔쳐 보는 기분이 아니라, 아무렇지 않게 읽을 수 있길 바란다. 궁극적으로, 내 욕망을 들여다볼 줄 알고, 그 욕망의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고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 보다 자유롭게 욕망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 그래야만, 상대방을 욕망하지 않을 수 있고 나아가 나의 헛된 욕망에 발목잡히지 않을 수 있겠지. 무엇보다도 억압되었던 욕망을 상대방에게 잘못된 방법으로 풀어헤치는 일만은, 그렇게 누군가의 불행을 자아내는 일만은 부디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적다보니 일개 개인인 나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무엇이 있을까 싶다가도 불편해도 직면해보고 싶은 작은 '용기'를 얻었기에 발걸음을 내딛어 본다. 우선,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을 시작으로 더 가감없이 나의 적나라한 민낯과 욕망을 파고 들어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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