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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경 Oct 20. 2016

나, 잘 살고 있는걸까.

주제없이 무아지경으로 써내려가다

자, 깜빡 깜빡 커서가 눈에 보였다가 안보였다가

나의 글쓰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난 날의 글처럼 딱 쓰고 싶은 주제가 있다거나, 어떤 생각이 담겼음을 놓치고 싶지 않는

그런 순간은 아니다.

딱 지금처럼 대체내 머릿 속에 어떠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는지 나조차도 고개가 갸우뚱 거려지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무작정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그래, 한번 손이 가는데로 내뱉어보자'라며 노트북 앞에 앉아있다.


'나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이 질문이 머릿 속을 스쳤다.

잘 살고 있다,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쨌거나 주관적인 '잘-' 이겠지만, 대체 어떠한 삶이 잘 살고 있는 삶일까 이부터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살고 싶은 삶, 머릿 속으로 그리는 삶이 바로 '잘' 살고 있는 삶일 텐데

그 삶은 바로 '주체성'이 갯벌에서 한바탕 구르고 나온 사람처럼 온 순간에 덕지 덕지 붙어있는 그러한 삶이다.

자, 그렇다면 현재 얼만큼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고 있는 일은 과연 '주체적'인 판단에 의해 선택한 것인가.

현재 '주체적'으로 '일'에 임하고 있는가.


6년여 전으로 돌아가본다.

'간호학과'를 가겠다고 선택한 이유

실로 차선택이었다. 나라는 사람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알고 있지 않았다.

이과임에도 불구하고 수학과 과학에 대한 흥미도가 상대적으로 많이 떨어져있었고

대학에 가서까지 좋아하지도 않는 공부를 하고 싶지 않은 열아홉 소녀의 차선택이었었다.

'간호', 결국은 직접적으로 '사람'을 위한 학문이니 그래도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었고,

그럼에도 나는 단 한번도 '간호사'가 되어 있는 나를 꿈꿔본 적이 없었다.

'간호학'을 배우되, 이를 바탕으로해 '다른' 직업을 가지고 싶었다.

또한 그 시절 소위 sky라 불리우는 대학의 '간호학과'를 가고 싶었고, 실로 그 이유는 그 타이틀이 있어야만

'성공한' 삶이겠거니 당연스레 여겼었기 때문이다.

수능을 봤고, 기대 이하의 성적을 받았으며, 자연스레 안전빵으로 수시를 넣어두었던 대학교에 가게되었다.


나는 죄인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너처럼 열심히 하면 정말 잘될게 분명해-'라고 했던 친구들의 말과는 달리

누가봐도 독하게 공부하는 것처럼 보였던 나는 그 때의 기준으론 '잘' 되지 못했었다.

'너는 서울로 대학갈 줄 알았는데-'라고 무심히 뱉은 친척들의 말은 알게 모르게

내 가슴을 찢어놓았다.

고등학교 졸업을 한 이후 단 한 번도 학교를 찾아가지 않았는데

'좋은 대학'을 가지 못했다는 그 사실이 자아내는 나에 대한 실망감이 극대화될 것 만 같아 두려워서였다.

'좋은 대학'을 가야만 선생님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더더욱이나 찾아뵙기가

송구스러웠다.


스무살의 나는 원치 않았던 대학교에 다니고 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인정하지도 못했다.

약 칠십여명의 같은 학번 사람들과 나는'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닌데..'라 오만한 생각이 들었고 반드시 최상위권에 들어야 된단 오기가 생겼었다.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도서관에서 죽이되든 밥이되든 밤을 새며 공부를 했다.

진정 간호학 학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라기도 보단, 높은 학점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어느 날엔 도서관에서 잘 알지도 못하겠는 미생물학을 공부, 아니 암기하고 있는데 잘 외워지지가 않았었다.

내일 당장 시험을 봐야 되는데 외우지 못한 분량이 너무도 많고  과연 남은 시간안에 만족할 만큼 암기할 수 있을지 자신감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그런 불안감이 엄습해오며 나는 도서관을 한번 쭉 둘러보기 시작했다.

'다른' 애들은 나보다 잘 하고 있는건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처럼 발 동동 구르며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그 순간 '엄청난' 두려움이 몰려왔다. 어쩌면 나만이 펼치고 있는 경쟁 레이스에서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나를 덮쳤고 펜을 쥐고 있는 손이 덜덜 떨리고 도저히 숨막히는 도서관 안에 앉아 있을 수 없어서

밖으로 뛰쳐 나왔다.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했고 엉엉 울면서 도저히 못하겠다고 했다. 그리곤 한참을 천변을 따라 걷다가 겨우 진정시키고서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갔었다.

나의 불안함과 두려움은 시간이 지나며 나름의 노력들을 하면서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대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도

'경쟁' 프레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여전히 나는 남들과 '다른' 사람이고 싶어하는 것 같다.

실은 어떠한 '우월감'이 있었던게 분명하다. 어쩌면 지금도 아주 자그만하게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대체 왜 내게 그러한 '우월감'이 생겼는지 보니, 바로 그것이 남들보다 '부족하다' 생각되었던

나의 환경을 가려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듯 싶다.

더 '나은 ' 사람이어야만 했다. 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본다.

그래, 늘 더 '나은' 사람이고 싶어 했던 네가 했던 선택들이 과연 '주체적'인 것이냐,라고 했을때

답은 No, 이다.

너무도 강했던 그 열망은 내 안의 진짜 '동기'를 읽어내지 못하게 가려버렸다.

단 한 순간도 쉼 없이 뒤쳐지지 않아야 겠단 생각에,

누군가에게 적어도 부끄럽지 않을 타이틀을 쥐어야 겠단 생각에,

스스로에게 '진짜 원하는 삶'이 무엇이냐고 차분히 물어볼 여유조차 갖지 못하였다.

대학교 4년 그리고 일을 시작한지 2년차

진정 내가 원하는 이야기가 담긴 삶이 아닐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잘' 살고 있지 않다.

인정하자. 주어진 환경 속 얼마간의 주체성을 쥐어보려 애를 썼을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에 '나라는 사람'과 '주체성'과의 거리는 지구 반바퀴정도 되는 것 같다.

'애를 썼다' 표현한 이유는 현재 그러한 노력을 하는 것에 지쳐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실로 근래 내 삶의 패턴을 돌이켜봤을 때, 도통 '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잠을 자고 꿈을 꾸는 그 순간까지도 말이다.

어쩌면 내가 놓여있는 이 환경 자체에서 온전히 주체적일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1부터 100까지 모든 것을 그려보고 행하고 부딪히는 그런 삶을 강렬히 열망한다면

언젠간 떠나야하는 것이 맞다.



진정 원하는 삶이 뭔지

생겨먹은 대로 살아야 한다는데 대체 난 어떻게 생겨먹은건지

'나'를 풀어헤쳐보고 싶다.


지금 내게 가장 큰 열망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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