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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경 Jul 04. 2017

나의 흙탕물은 아름답다

흙이 풀리어 물이 흐려진 상태


한바탕 비가 쏟아지고 나서 흙탕물이 보였다.


장마철이 시작되었다. 

후두두둑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이 세상 모든 소리를 집어삼킬 듯 

오랜만에 비가 쏟아졌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

언제나 걷곤 했던 그 다리 위를 지나가던 중이었다.

저 멀리 한강이 보이고 한강으로 향하는 작은 천(川)을 아래에 둔 다리였다.

쏟아져 내린 비는 강바닥에 쌓여 있던 흙을 마구잡이로 흔들어 댔고

늘 맑아 보이던 강물은 이제껏 내가 봐왔던 색이 아닌 텁텁하고도 흐린 모습이었다. 

찰나의 시선이 흙탕물에 한참 동안 머물렀다. 


불순물로 가득해 깨끗해 보이지 않은 저 갈색 빛의 물은 누가 봐도 아름답지 않다.

깊숙한 곳에서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가

'으- 흙탕물이잖아, 저 흙탕물과 나는 1%도 같은 구석이 없을 거야-'라고 말했다.

동시에 '아- 저건 지금의 내 마음 상태랑 똑같잖아!'라는 말이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순간 흙탕물을 바라보고 있던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렸다.



내 안에도 분명 저처럼 깊은 감정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겠지.
겉보기엔 꽤 맑아 보이기도 하고 큰 문제없이 잔잔히 흘러가는 것 같았잖아.
깊숙한 감정의 바닥엔 무엇이 자리 잡아 있는지 모르는 채로 살아왔던 거야.
강물의 잔잔함을 헤칠 수 있는 작은 조약돌 하나 누가 던질까, 늘 두려웠어.
언젠가부터 철저히 외로움의 공기가 가득해졌고. 
실은 누구나의 물줄기가 잔잔히 만 흐르고, 맑아 보이기만 했던 것은 아닐 텐데
비현실적인 감정의 평온함을 내게 강요했던 게 아닐까.



저 흙탕물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던,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감정의 불순한 면까지 모두 '나'의 것임을.

무섭게 내리치는 천둥과 빗줄기는 도저히 내가 막아낼 수 없다.

바들바들 떨게 되지만 

비로소 빗줄기로 인해 깊숙한 공간 속 외면했던 감정들이 동하기 시작한다.

맑아 보이던 나의 물줄기는 흙탕물처럼 흐릿하고 텁텁한 상태가 되었지만

더 이상 이 모습이 싫지 않다. 그리고 두렵지 않다.


나를 가두고 있던 철저한 '감정의 외면'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숨겨두었던 감정의 약한 부분이 건드려지기라도 하면 언제나처럼

눈물이 먼저 터져 나온다.

하지만 진정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겪어야 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몰아치는 빗줄기에 오히려 감사함을 느끼고,

그 빗줄기로 인해 마주하게 되는 켜켜이 쌓아둔 감정의 수많은 면들에게

'숨어있느라 얼마나 힘들었어, 이제 다 표현해도 좋아-'라고 말할 것이다.

마음껏 이 감정의 물 안에서 부유하고 또 부유해도 좋다며... 


내 감정의 흙탕물은 그래서 내겐 아름답다.  




main image 출처 : http://suzukichiyo.tumblr.com/post/33946906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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