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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경 Nov 02. 2015

'생소함'을 선물하다.

생애 첫 오케스트라 공연으로부터

#1. 내 생에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았다.
이 선택은 단순히 끌림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막연히 지금 나를 둘러싼 환경에만 머무르고 싶지 않다던 생각을 늘 한켠에 둔 채로 살아가고 있던 중이었다.
이는 책을 읽다 구체적인 형상으로 그려졌는데, 바로 이 단어 덕택이었다.
'상황의 노예'
일어나서 출근을 하고 일을하고 퇴근을 하고 잠을 자고
이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나는 새로운 무언가에 대한 갈증이 점점 커져만 갔다.
날 도끼질 하는 그 짜릿한 순간들이 점차 뜸해져가고 있음이 사실 조금 두려웠다.
'의미부여'를 하며 천천히 얻는 그 묵직한 도끼질조차
피로함이라는 방패로 막아내는 마당이었다.

점차 '상황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그냥 시간이 흐르는 대로, 몸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가는 순간들이 많아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머물러 있으면 안되겠다, 싶었다.
작은 노력의 일환으로 '생소한 것'에 나를 노출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오케스트라 공연을 선택했다.

창의성의 발현은 흉내내기(키치)가 아니라,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추억의 퇴비 속에서 이루어진다.
만약 창의성을 고민한다면, 사람을 만나되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고, 땅을 밟되 처음 밟는 땅을 밟고, 책을 읽되 생소한 분야를 읽어야 한다.
생소한 것들이 부단히 나를 자극할 때 그 자극에 의해 지각이 갈라지고 용암이 터져나온다.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中-



베니스 바로크 오케스트라와 줄리아노 까르미뇰라의 협연.
관련 지식이 0에 가까운 클래식 공연에 그나마 누구나 알고 있는 비발디 '사계'의 연주가 포함되어 있어
민망하지만 '기대'라는 것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앞에서 세번째 자리, 연주자들의 표정 숨소리가 들릴만큼 그 가까운 자리에 앉아
'생소함'의 세계에 빠질 준비를 하고 앉았다.
 3000원을 주고 산 프로그램 북을 떨리는 마음으로 읽어보려는데
온통 모르는 단어들과 해석들로 눈에 읽히지가 않았다.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 온게 잘 한게 맞을까. 아는 만큼 들린다고 하는데 음악적으로 하나도 아는게 없는데 어떡하지...'
백지 상태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그렇담, 정말 순수하게 연주를 느껴야지 싶었다.
그리곤 아주 다행히 100여분의 공연에 퐁당 빠졌다가 나왔다.





#2.

물론 내게 음악적인 사전지식이 있었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연주하는 음악들을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고 평가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냥 그 순간의 음악들에 몰입하고자 했다.
아니 어떤 의도가 들어있을 틈도 없이 몰입해있었다.
눈을 감았고, 날 가득 둘러싼 그 선율들에 몸을 맡기어 춤을 추고 싶었다.
들키지 않을 만큼만 선율에 맞추어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단순히 선율만이 음악이 아니었다.
연주에 몰입한 연주자들
그들이 서로 호흡하며 만들어내는 밀고 당기는 강약조절과 미세한 움직임과 표정들.
머리가 휘날릴정도의 열정적인 연주와 함께 들려오는 줄리아노 까르미뇰라의 거친 숨소리도 그의 발소리도
 다 '음악'이었던 것 같다.
음악을 단순히 '들었다'보단 '듣고 보았고 느꼈다'가 더 어울리는 그런 공연이었다.

공연 이후 검색해보다 우연히 본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보자니
나와는 달리 본 사람도 많더라.
그의 발소리가 거슬렸다던 사람도,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다던 평도,
악보가 제대로 넘어가지를 않아 잠깐 연주를 멈추고 다시 시작했던 그의 무대 매너를 탓하기도 하더라.
또다시 내가 너무 마냥 좋게만 공연을 보고 온건가,
전무한 지식이 나를 그저 수용적인 관객으로 만들었나, 란 쓸모없는 물음에 잠깐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금방 그 감정을 주워담았다.
같은 것을 보았다고 같은 평가를 내려야만 한다고 그 누가 그랬던가.
'정답은 없다'라는 이 심플한 사실을 잠시 잊었었다.
나는 그를 그리고 그 공연을 애초부터 평가하고자 하지 않았고(없었던 것일수도 있지만)
정말 순수한 어린아이의 눈으로 공연을 바라보았다.
내가 받은 느낌이 내게는 정답이다.


#3.

음악적인 인사이트를 얻을 수는 없었지만
100여분의 공연을 보고 나서 나만의 인사이트가 차츰차츰 그려졌다.

'어떠한' 것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아우라'를 뿜어내는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끝없는 노력이 담긴 시간의 세례가 필요하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
그를 바라보며 생동감있는 깨우침으로 다가왔다.
무대 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그를 보며
나도 모르게 어릴적 소년인채로 존재하는 그가 잔뜩 긴장하거나 혹은 설레어하며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을 그렸다.
오케스트라와 함께 협연하는 연주를 보면서도 그들이 함께 얼마만큼의 시간을 들였을지,란 생각에 잠시 머물렀다.
그렇게 이 공연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시간'이 다가왔던 것 같다.

나는 얼마만큼의 시간을 들여보았는지,
'시간'을 쏟는다는 것을 두려워해 시작조차 못하고 있었던 일들을 얼마나 숨기고 살아가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문득, '시간을 들이는 것'에 익숙해졌다는 배양숙 상무님의 말씀이 들려온다.
그리곤 기숙사의 벽에 붙여놓은 '매일매일 조금씩의 위력은 참으로 크다'는 문장이 자연스레 한 곳으로 묶인다.
꾸준함,  이것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임을 다시금 다시금 새겨본다.

그 아무리 멋진 연주 실력을 가졌다고 한들, 혼자서는 그려내는게 불가능한 연주.
함께이기에 만들어 낼 수 있는 '음악'을 느끼며 다시금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호흡을 맞춘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임에 틀림없다.
그 호흡으로부터 연주는 살아움직일 수 있고, 어쩌면 우리도 누군가들과 호흡을 맞추며 살아숨쉬는 하루들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생각의 꼬리는 '함께' 협연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역량이 준비되어져 있어야 한다, 로 이어졌다.
준비되어져 있지 않은 나와 협연해 줄 이는 없다.
살아가며 단 한 번은, 함께 빛 낼수 있는 오케스트라를 만나고 싶다.
그렇기에 부지런히 나를 갈고 닦아야한다.
언제가 만날 나의 오케스트라에서 부끄럽지 않게 시간을 들여 멋진 연주를 하기 위해선 말이다.

그리곤 끊임없이 찾아야한다.
어떤 연주를 하고 싶은지.
내 안의 어떤 것을 꺼내어 놓을 수 있을지.
아니, 어떤 것이 있는지부터.


이렇게, 생소한 오케스트라 연주와의 만남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자꾸만 잊는 삶의 지혜를 내 안에 살아숨쉬도록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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