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들른이 Jan 10. 2019

이 망할 놈의 R&R

내 거인 듯 내 거 같은 내 거 아닌 업무

오늘도 어김없이 오르는 혈압을 주체하지 못해 뒷목을 부여잡고 퇴근한다. 

열은 받지만 차마 들이받지 못한 채 술자리의 하소연과 뒷담화로 열린 뚜껑을 닫는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바로 마법 같은 한마디다.


"그건 제 담당이 아니라서요."

'그럼 이 일은 대체 누가 하냐!'


모든 조직엔 업무에 대한 R&R이란 것이 존재한다. 각 부서나 담당자의 업무 범위와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의함으로써 각자의 역할을 명확히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작던 크던 대부분의 조직 내에서는 이 R&R과 관련된 갈등이 많다.

조직을 하나의 자동차라고 봤을 때 각 부품의 역할과 범위, 성능이 명확하지 않다면 자동차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걸 자동차라고 할 수도 없다. 소비자는 불안해서 그 자동차를 구매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처럼 R&R이 명확하지 않은 회사는 제대로 된 기능을 수행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고객들로부터 외면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다. 조직을 구성하는 것은 결국 사람인지라 이 명확한 규정이 사람에 따라 달라지고 흔들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일에 대해선 R&R이 없는 경우가 많은 데 이럴 때 그 업무에 발을 디디는 순간 혼돈의 카오스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업무 중 누군가에게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가정해보자.

당사자가 해당 부서에 찾아가면 담당자라고 생각했건 직원은 '그건 제일이 아닌데요'를 시전 한다.

당사자는 다시 '그럼 이건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죠?'라고 되묻는다.

그럼 몇몇 부서를 이야기해준다. 미루는 것이다.

하지만 그 부서에 찾아가 봐야 돌아오는 대답은 대동소이하다.

'글쎄요. 해본 적이 없는 업무라. 저희 일이 아닌 것 같네요'


이렇게 되면 당사자는 부평초처럼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문제 해결을 위해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다. 어느 부서도 자기 업무라고 인정하지 않으니 아쉬운 사람이 해결하게 되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이 과정에서 회사의 규정과 전문적인 지식을 하나하나 짚어가다 보면 (자기 일이 아니라던) 그 부서의 답변이나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기 일이 아니라며 두 손을 들었던 그 부서가 결국 키를 쥐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솔직히 이거 너네 일 맞지 않니?

그럼에도 그 일련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인정은커녕 오히려 왜 우리한테 묻냐며 불만스러운 태도를 보이기 일쑤다. 한술 더 떠 어찌나 본인들의 경험과 지식을 뽐내며 이것도 모르냐며 무시하는지 눈꼴시지만 그럼에도 당사자는 표현할 수가 없다. 그리고 위로한답시고 당사자에게 반대로 고생한다고, 열심히 하라고 응원을 해준다. 이건 마치 택시를 탔더니 택시기사가 대신 운전시키며 격려하는 꼴 아닌가. 그 순간만큼은 오른손에 잠든 흑염룡의 기운이 깨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문제는 나중에 유사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이다. 그 상황이 되면 어이없게도 과거에 그 문제를 해결했다는 이유로 담당자로 낙인찍히곤 한다. 아 이건 정말 아니지 않니? 양심 좀 갖고 살라고 쫓아가서 리라도 냅다 지르고 싶어 진다.


개인적으로 서로 일을 미루는 각 부서 담당자들을 모아서 삼자대면을 시킨 적이 있다. 그러자 놀라운 상황이 발생했다. 각 부서의 (모두 최소 과장 이상인) 담당자들이 정치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절대 트집 잡히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을 미루더니 결국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제3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 없는 다른 부서의 책임으로 던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창의적일 수가!! 정말 정반합의 신묘한 원리를 이해한 날이었다. 물론 그 부서에 가서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것은 내 몫으로 남겨두고 말이다. 만족스럽게 돌아서는 그들의 작태를 보며 기가 차서 결국 업무 진행을 포기해 버렸었다.




이런 경우는 대체로 담당자가 그 업무를 오래 해왔거나 연차나 직급이 조금 있는 경우 특히 많이 발생한다. 그 업무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활용하여 현란한 혀놀림으로 상대방을 정신 못 차리게 한 후 직급과 나이에서 나오는 짬을 통해 업무를 미뤄버린다. 이건 겪어본 사람만 아는 백전불패의 전략인지라 알면서도 속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정말 뒷동산에 묻어버릴 수도 없고......


두 번째 경우는 사실 좀 다르다. 이건 정말 회사에 R&R이 없는 경우이다. 회사가 사회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신규 사업을 할 때 종종 발생한다. 이런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아쉬운 사람이 해야 한다. 필요할 때 관계 부서의 협조를 구할 수는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잡고 매듭을 짓는 것은 결국 그 일이 필요한 사람의 몫이다. 그렇게 일이 한 사이클을 돌고 전체적인 프로세스가 정리되고 나면 조직은 변화된 상황에 맞게 R&R을 조정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적합한 담당자가 정해지게 된다. 이런 경우는 나름 이해할 수 있고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여겨진다. 급변하는 상황을 항상 즉각 대응하기는 힘들고 모든 가능성을 파악하고 대응책을 마련하기란 실질적으론 불가능에 가까우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새로운 일이 생겼을 때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나서지 않는 '조직원들의 자세'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새로운 업무에 대해 소극적이고 방어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업무일수록 도전적인 태도와 적극적인 자세가 정말 필요하건만, 담당자들은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며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려 한다. 정작 어떻게 해야 되게 만들 수 있을지를 물으면 '아 몰랑~'을 시전해 버리면서 말이다.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과 무지, 그리고 업무 회피력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 불행이 시작되는 셈이다.




누구나 일은 바쁘고 격무에 허덕인다. 또한 누구나 새로운 일을 떠 않기 싫다. 누구나 지금 바쁜데 갑작스레 새로운 일을 가져오면 싫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업무를 튕기면 대체 우리는 어디 기대란 말인가.


오늘도 '그건 제 담당이 아닌데요',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세요'를 내뱉는 주둥아리를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고 퇴근길 버스 안에서 분함을 곱씹으며 하루를 마감한다.


그래도 어찌하리. 요즘 같은 세상에 성질부려봐야 당사자만 손해인 것을.

살살 달래던가 그게 아니꼬우면 그냥 내가 하던가, 둘 중 하나인 것을...

가끔 한 번씩 '그럴 때는 이렇게 하면 된다'는 명쾌한 답변을 주는 관계 부서 담당자들이 있어 그래도 회사는 굴러가고 실무자는 다시 한번 힘을 낸다.

마음속 깊이 언젠가 내게도 다가올 그 순간을 기다리며 말이다.



"그건 제 일이 아닌데요!"라고 외치는 그 순간을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팀장의 역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