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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른이 Jan 30. 2019

[서평] 저스티스 맨 / 도선우

현대의 정의란 무엇인가

'저스티스 맨'은 주제의식, 플롯도 우수한 소설이자만 가장 먼저 이야기할 것은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인식의 틈을 날카롭게 짚어내는 '문장력'이다. 주제의식을 떠나 그 표현만으로 뇌리에 박히는 묘사야말로 작가의 짬에서 나오는 진정한 바이브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인생이 답답하다고 해서 그가 살아온 나날을 그 시점으로부터 부지런히 뒤로 되돌려본다고 한들, 별반 다를 것 없는 생의 연속에 지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어느 세계에 자신의 영혼을 걸어놓고 오로지 육신만 이 땅으로 내려와 허우적거리는 사람처럼 희미한 존재감을 지속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주제 의식이 가볍거나 얕다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표지와 제목이 너무 추리 소설스럽게 꾸며져서 이 책의 주제의식을 제대로 내비치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결국 키보드워리어로 대표되는 무기명의 언론이 얼마큼 잔인하고 비겁하며, 약삭빠른지 그리고 이중적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 일련의 과정은 지난 어떤 기사와 전문가들의 의견보다도 더 적나라하고 명확하게 다가왔다.


사람들은 가끔 자신이 살아온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혐오하며 자괴감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러한 자의식 과잉이 뒤틀린 욕망으로 발현되는 순간이 바로 부당함으로 피해를 본 타인의 삶을 목격했을 때라고 저스티스 맨은 주장했다.​그것은 피해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타자의 처지에 밑도 끝도 없이 분개하여 정의감처럼 느껴지는 감정을 불사르고, 그 감정의 정체를 미처 분간하기도 전에 일방적인 옹호를 칼날처럼 내세우며, 가해의 원인일 것으로 추측되는 대상을 무차별적으로 질타함으로써 자신의 자괴감을 희석하려는 자구책의 전형일 따름이라고, 비열함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라고 그는 모질게 평가했다
그렇게 몰아가듯이 형성된 사명감으로 이루어지는 정의는 당당한 만큼 더 잔혹한 이면을 지닐 때가 많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엄청난 압제의 쾌락


사실 인터넷이 발달이 될수록, 사회가 복잡해지고 삭막해져 갈수록 이 무기명의 여론이 하나의 언론이 되고 세력이 되는 모습은 요즘 들어 부쩍 많이 보인다. 국정원이 앞장선 댓글 알바가 대표적이긴 하지만 일반기업과 언론이 여론을 호도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겨 온지는 훨씬 오래됐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블로그 광고, 이익 집단화된 카페, 이념단체 등 예전 같았으면 찻잔 속 태풍에 불과했을 사람들의 모임이 인터넷을 만나면서 원래의 잠재력 이상의 영향력을 가지게 되고 있다.

결국 그것은 얼마나 돈을 들이고 뻔뻔하게 밀고 나가며 시간을 투자하냐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 정의, 합리성의 문제가 아님에도 조회수와 회원 수로 무장한 그들은 하나의 세력이 되어 사회를 어지럽히게 된다. 그 정도까지 흘러가면 그런 그들을 이용하기 위한 또 다른 세력이 더해지면서 그들 스스로 자신이 무엇인가 가치 있는, 성공한, 중요한 위치라는 착각에 빠져 우월감을 휘두르며 주변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정작 현실에선 그 정도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함에도, 인터넷 세상의 평가를 더 맹신하며 결국 현실세계에서도 그 힘을 얻기 위해 무리수를 두고 결국 그것은 첫 시작 단계의 순수성이 변질됨을 의미한다.

이런 모습을 너무도 숱하게 보게 됨에 이제 사람들은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래야 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인터넷 세상은 원래 그래야 하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이며,

그렇지 못하는 게 바보 같다고 조롱하고, 그 잘못에 편승하는 자신의 행동 역시 그렇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착각에 휩싸이는 것이다.

이건 인터넷을 믿을 순 없지만 그 불신 이상으로 인터넷에 의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현대인이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목청 높여 옹호하던 세력의 반대편으로 돌아서는 게 아주 타당한 행위임을 합리화할 수 있는 구실이 그들에겐 필요했는지도 몰랐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이리저리 휩쓸리기만 했을 뿐 딱히 나만의 의견이랄 게 없었던 자신의 존재에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핑계가, 그들에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이전까지는 킬러를 옹호하는 세력에 묻혀 있는 게 더 정의롭고 당연하고 안전하다고 그들은 믿었었다. 그러나 아홉 번째 살인이 발생한 뒤 급격하게 바뀐 사회적 분위기가 그들을 서서히 초조하게 만들었다. 더는 킬러를 옹호하는 세력이 더 큰 무리이자 정의로운 일을 행사하는 세력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세력은 어느샌가 킬러를 혐오하고 저주하고 질타하는 무리 쪽으로 옮아가 있었다. 그들은 불안했다. 이제 자신이 속한 무리는 더는 주류가 아니었다. 약자의 무리에 속한 포유류 고유의 불안을 그들은 감지했다. 너른 초원 위에 홀로 동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단 한 방에 목을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는 송곳니를 가진 맹수가 풀숲 어디선가 안광을 번뜩이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어서 빨리 더 큰 세력을 가진 무리 속으로 희석되고 싶은 갈망이 마음속에서 조급하게 샘솟기 시작했다.
이중적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양면적인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잣대라는 자체가 아예 사라진 시대를 마치 허우적거리듯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인터넷 여론에는 언제나 피해자가 있기 마련인데 생각보다 이들이 피해자가 되는 이유는 오히려 부당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말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냥 웃음의 대상이 되거나 가십의 대상이 되면서 신상이 털리는 경우도 태반이며 누군가 모함을 하기 시작하며 진실과 상관없이 천하의 악당이 되는 경우도 있다. 범죄의 피해자가 흥밋거리로 전락하며 제2차, 3차 피해를 입더라도 이 인터넷 여론은 흥미의 유무에 집착할 뿐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각 상황을 이러한 현상과 잘 연계시키며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부분이 읽는 사람에게 재미를 느끼게 해 주었다. 이런 복합적인 묘사와 플롯이 아니었다면 어찌 보면 너무도 뻔한 주제와 내용으로 보일 수 있었을 테지만 어디에 정의가 있는지 책을 덮는 순간까지도 의심하게 만들면서 집중력을 끝까지 유지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굳이 장르를 나누자면 스릴러물에 가깝다고 하겠지만 현실과 밀접하게 맞닿은 주제와 이야기로 읽는 이로 하여금 단순한 재미 외에도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그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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