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생'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하나의 사회현상처럼 이제는 단어 자체가 힘을 지녀 요즘은 '90년생이...'라고 하면 그 자체로 뜻이 통한다.
'90년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90년생은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요즘 이런 고민을 하며 어려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책에서 그에 대한 정답이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저자가 관찰하고 서술한 부분을 곱씹으며 그곳에서 어떤 시사점을 찾을지는 독자의 몫 이리라.
90년생에 초점을 맞춰 자칫 헷갈릴 수 있지만 결국 이건 세대차이와 갈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세대갈등은 언제나 있어왔다. 각 세대는 그 세대가 겪어 온 환경에 따라 성향과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은 필연적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할 때마다 그들을 '적응하고 이해하기 위해' 다소 호들갑스럽게 관찰하고 분석하며 정의 내려왔다. 이 책 역시 그 연장선에 놓여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 90년생이 사는 지금의 시대상을 이룬 것은 기성세대들이다. 그들이 치열하게 살아온 결과물이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었고 그 트렌드가 90년생을 키웠다. 기성세대 스스로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별종 세대를 만든 셈이다.
그런데 90년생의 특징은 오롯이 그들만의 것일까?
최근 기억을 더듬어보면 40대 중반에 명예퇴직을 하고 나서 공무원 시험을 보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지금 3~40대 중에 취업도 결혼도 포기하거나 설령 결혼을 했어도 경제적인 이유로 부모에게 빌붙어 사는 캥거루족이 늘고 있다는 통계도 있었다. 그리고 요즘 부쩍 기가 막힐 정도로 개인주의적인 사람 많이 마주치지 않나? 그들이 다 90년생이던가? 묻지 마 범죄나 패륜 범죄의 가해자는 몇 살이더라? 유튜버가 되겠다고 고민하는 직장인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지 않나?
결국 핵심은 언제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지금이 어떤 세상이냐는 것이다. 일견 생각해보면 지금과 같은 저성장 시대에는 과거의 고성장 시대와는 생활방식이 다른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성세대들이 새로이 바뀐 시대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낯설어하는 것 역시 이상하지 않다. 이미 어느 정도의 삶의 기반을 갖춘 사람이 사회 초년생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적응하는 방식이 같을 리도 없고 말이다. 기성세대 입장에선 갑자기 게임의 룰이 바뀐 것처럼 느껴질 터이다 그저 지금의 90년생의 모습은 작금의 시대에 조금 더 잘 적응한 모습인 셈이다. 본인들이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나이를 떠나서 누구도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긴 조심스럽다. 변해가는 세상에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다면 지금 90년생의 모습은 불변인가?
90년생들에게 지금의 기득권 내지는 일정 수준 이상의 부가 주어진다면 지금처럼 9급 공무원을 선택할까? 그들에게 성공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금과는 삶의 자세가 달라지지 않을까? 90년생들도 여건이 된다면 소확행과 혼밥 혼술보다는 가정을 이루고 공동체적인 삶을 더욱 선호하지 않을까? 그저 지금 그들의 모습은 그들이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가혹한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동시에 90년생이 성장할 때 이 사회와 기성세대가 요구하고 보여준 세상의 가치는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특히 책에서처럼 90년생을 촛불시위, 원칙 중시의 성향 등을 예로 들면서 정의로운 세대라고 해석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이 사회가 가진 평균적인 정의로움보다 특별히 더 많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이 변화를 이야기하고 지지하는 것은 이미 공고한 장벽을 허물고 사회에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의 발로라고 보인다. 그저 더 이상 이 세상에 호구 잡히지 않고 착취당하지 않기 위한 행동들이 반사적으로 정의롭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본질은 본인들이 더 이상 손해보지 않고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세대 간의 생존을 위한 투쟁인 것이다.
90년생이 기득권층이 됐을 때 지금의 기성세대와 형태만 다를 뿐 본질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들 앞에 마치 게임처럼 입시나 취업의 가능성을 올려주는 아이템이 나타난다면 사지 않을 것 같은가? 이는 어쩌면 노력이 배신하는 부당한 사회가 만든 생존 방식일 뿐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90년생과의 갈등은 실제로는 그 대상이 90년생이 아니라 변해가는 사회인 셈이다. 90년생은 지금의 세상 밖에 모르니 기성세대들의 입장에선 답답한 것이고 90년생은 그런 기성세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방향성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결국 그렇게 세상은 흘러갈 것이다. 그러니 사무치도록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적응의 몫은 기성세대에게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가?
이런 적응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먼저 회사들이 새로운 조직문화를 만들고 현재의 트렌드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짚고 넘어갈 점이 하나 있다. 설령 세상이 변한다고 하더라도 그 변화가 회사에 미치는 영향은 업종의 특성에 따라 그 폭과 정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러한 조직의 변화가 기존 조직의 목적과 성장을 오히려 저해할 수도 있다. 군대와 반도체 회사가 동일한 인사제도와 운영규정으로 움직일 순 없고, IT의 발달이 군대와 반도체에 미치는 영향은 다를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따라서 무조건적으로 90년생을 포용해야 한다는 강박이 내포된 변화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때에 따라선 모두 무시하고 현재를 지켜야만 하거나 소폭 조정에 그쳐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정말 잘 갖춰진 제도라고 가정했을 때 90년생이 그 조직에 맞추고 적응을 하도록 유도해야 할 수도 있다. 최소한 마치 90년생을 맞추지 못하면 도태되고 잘못된 것이라는 강박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다양성의 확보이고 평등의 시작이다. 동시에 반대로 아무리 훌륭하고 필요한 조직이고 제도를 잘 갖춰놔도 시대에 맞지 않는 조직이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새로운 세대가 계속 그 산업과 조직을 피한다면 그 조직은 어쩔 수 없이 사장될 것이다. 수공업 명장과 제주 해녀가 그렇듯 말이다.
결국 결론은 조직의 목적과 특성에 맞는 인재를 영입하고 운영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명제로 귀결될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행방안까지는 모르겠지만 무조건 트렌드를 따라가지 말자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방점은 변화가 아니라 상호적응이라고 생각한다. 기존 조직 문화에 90년생을 흡수함과 동시에 기존 조직원 역시 90년생을 포용할 수 있게 서로 이해하며 조금씩 맞춰가야 할 것이다. 회사도 사람도 모두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90년생 잡으려다가 조직 자체가 와해될 수 있다.
90년생을 상대로 비즈니스를 할 때 이러한 적응은 더욱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결국 기업 입장에선 90년생들의 관심과 선택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학관계는 기업 입장에선 굉장히 일방적이고 편향적인 관계다. 예전엔 기업이 정보의 비대칭성과 공급자의 지위를 이용하여 시장을 이끌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고객을 이끌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의 시장은 그렇지 못하다. 정보의 비대칭성이 무너지면서 기업이 그런 우위를 모두 잃어버린 까닭이다. 책에서 예시로 들고 있는 해외직구, 독립출판이 이런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사례일 것이다. 하물며 시장의 경쟁이 치열하고 후발주자들의 성장 속도도 빨라 예전처럼 하나의 기업이 독점적 지위를 인정받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단합과 꼼수는 점차 눈치가 보여 실행하기도 어렵고 효과성도 떨어진다. 결국 억울해 미치겠지만 이제는 고객의 마음에 들기 위해 기업이 전전긍긍해야 하는 시기이다. 정면 승부와 경쟁력만이 답이다. 그런데 막상 이게 실행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담당자들은 알 것이다. 그러다 보니 90년생 신입사원의 행동엔 화가 나고 비난을 일삼다가도 90년생을 고객으로 시장분석을 할 때는 90년생의 특징을 이해하고 여기를 어떻게 공략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혁신에 혁신을 거듭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그렇다고 하면 실제로 90년생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마케팅 담당자가 아닐까?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본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는 너무 원론적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이걸 모르지도 않을 것이고, 그걸 알지만 각자의 사정에 따라 90년생을 이해하기 위해 읽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길게 말을 이어 붙인 것은 최대한 편향되지 않은 시각으로 90년생을 우리 사회를 바라봤으면 하는 자기반성과 노파심의 발로다.
개인적으로 90년생을 이해하는 게 너무 억울한 사람 중의 하나다. 윗사람 맞춰가며 내 목소리를 어렵게 어렵게 관철시키며 이제 중간쯤 와서 좀 힘 좀 줘보려는 데 갑자기 나타난 아래에 치여서 내 목소리는 다시 묻히는 것 같아서 이런 분위기가 참 싫다.
솔직히 다른 기성세대들 역시 90년대생을 보면 짜증이 앞설 것 같다. 왜냐하면 자신과 너무도 다른 것도 그렇고 기성세대가 스스로가 지키고 발전시켜온 지난 시간과 문화 그리고 가치관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 같아서이다. 기성세대들은 지난 시간 그토록 치열하게 열심히 살았건만 너무도 빠르게 바뀌어 버린 세상에선 자신의 가치관이 가치를 잃는 것을 보며 허탈감이 들 것이다. 게다가 정치인들과 미디어가 나서서 더욱 이런 분위기를 부채질한다. 하물며 그 허탈감을 표현할 곳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특히 현재 중간에 껴 있는 밀레니얼 세대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다. 기득권층에 속하지도 못했는데 노땅 취급이다. 아직 젊건만 이 시대의 주도권과 미래는 이미 90년생들에게 넘어가고 있다. 아직 우리의 가치관은 검증받지 못했지만 벌써 뒷 방 늙은이 신세다.
그런 상황에 그 변화된 가치관의 대변자처럼 90년생들이 나타났으니 우리의 짜증이 그들을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이야기했듯 이것은 시대의 변화에 그 원인이 있다. 90년생을 탓해봐야 소용이 없는 셈이다. 오히려 지금 사회의 원인 제공은 기성세대이니 자기 발등을 찍은 셈이다.
하지만 아직 기성세대들에게 주어진 미션은 남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단순히 이해와 협력 외 올바른 방향성의 설정이다.
병맛 코드, 줄임말, 종이책의 종말, 동영상 시장의 성장, 해외직구, 소확행, 워라밸, 개인주의 등 그들의 특징을 일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런 사회 현상을 우리는 어디까지 이해하고 수용해야 하나? 그 안에서 어떤 문제점을 찾고 새로운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걸까? 지금 이 트렌드의 끝에 정말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는 걸까? 과연 기성세대의 이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중국의 마윈이 90년대생을 보며 '젊은 세대를 믿어라'라고했단다. 그 믿음의 모습이 방치는 아닐 것 같다.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방향성을 설정하고 선배의 노하우를 공유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개인적인 가치관의 갈등으로 그 들을 포기하고 놓아버리고 비난만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건 참으로 힘들고 고된 과정일 것이다. 그럼에도 가야 하는 길일 테고 말이다.
P.S 그런데 말이다. 90년생만 신경 쓰지 말고 80년생들도 좀 키워주길 바란다. 우리도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도 손에 들고 있는 것도 없이 아직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산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고 정시가 수능으로 바뀌고 새로운 교육제도와 새로운 사회제도의 테스터 역할을 했던 80년생 초반은 언제나 끼인 세대였다. 윗 세대가 보기엔 너희는 우리완 다르다고 하고 아래에서는 윗세대와 다를 게 없다 하니 우린 정체성이 모호하다. 우리가 그렇게 되고 싶어 된 것이. 아닌 데 말이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위에서 치이고 아래에서 치인다. 어떤 사회적 제도도 우리를 위해 딱 들어맞는 것이 없다. 세상이여 끼인 세대도 믿음을 좀 주길 바란다. 90년생이 벌써 와버리면 우리는 어디로 가란 말인가. 같이 좀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