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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른이 Mar 11. 2020

[서평] 수축 사회 / 홍성국

게임의 규칙이 바뀐다

그런 책들이 있다. 독자에게 실적인 영향력을 미쳐 그들의 인생관변화시키는 그런 책들이 있다. 이러한 영향력이유는 내용, 공감, 시각 등 다양하지만 결국 독자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점이 닮았다. 내게는 이 책이 그렇다. 이 책이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 책에서 보여주는 시사점이 내게는 번쩍이는 아이디어처럼 설득력 있게 다가왔을 뿐만 아니라 평소 마음속에 남아 있던 미심쩍은 의문과 의아함을 해소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다.

경제 규모가 수축이 되면 경제 규모의 증가를 전제로 이루어진 이 사회는 근간부터 흔들릴 것이다. 처음에는 경제 규모의 증감은 반복적으로 발생했던 것인데 뭐 그리 새로운 일이라고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인지 와 닿지 않았지만, 저자의 주장을 바탕으로 현재 사회 모습개인적인 경험을 교차시켜보니 어쩌면 저자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큰 변화와 위기가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사회의 양극화와 입체적 갈등

수축 사회는 양극화를 더욱 가속시키고 이에 따라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이미 사회 곳곳에서 모두의 모두를 향한 갈등이 치열해지고 있음은 다양한 사회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양극화는 중산층을 빠르게 무너뜨릴 것이다. 자본에 의한 계급제가 더욱 공고해지는 것이다. 이미 더 이상은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 어려워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각종 복지정책을 추진하고 부자들의 자본을 사회 전체로 분배하고자 한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분배되는 자본은 진정한 저 위의 자본가들이 아닌 어중간한 부자와 적당히 돈이 많은 사람 즉 조금 돈 많은 중산층의 것이다. 정치와 경제를 휘어잡고 있는 대기업과 상류층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토해낼 리가 없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정부의 복지정책이 가속화될수록 기존의 중산층은 점차 제약이 많아지고 자본을 증식할 길이 막히면서 전 국민의 하향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대기업만 자본을 내세워 어려운 환경 속에서 생로를 찾고 중소기업들은 오히려 경쟁력을 잃고 있다.  

이런 현상을 사회가 선진화됨에 따라 과거의 적폐를 청산하고 경제적, 사회적 정의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수적인 피해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의도가 어찌하든 양극화를 가속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하고 있음은 부정하긴 어렵다.


'4차 산업혁명'

특히나 저자는 양극화에서 자본보다는 4차 산업혁명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통해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일종의 자본화가 되어 양극화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도 전통적인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그동안 쌓아온 네임밸류에 비하여 손익에서는 그다지 좋은 성적표를 받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IT 기업은 승승장구하고 있으며 그로 인한 기술과 자본을 이용하여 미래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런 추세가 이루어진다면 4차 산업혁명의 물결에 올라탄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간의 간극이 천지차이로 벌어질 것은 쉽게 예상이 가능하다.

동시에  양극화와 공급과잉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들은 한계비용 감소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4차 산업혁명을 통해 한계비용 제로 사회가 나타날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수출 중심 국가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왠지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의 중소기업, 중산층의 암울한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 섬뜩하다.
 
양극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아마도 사회적 갈등의 심화일 것이다. 경제 규모가 수축된다는 것은 과거에는 둘이서 충분히 나눠 가질 만큼의 파이가 있었다면 어느 순간 한 명분의 파이 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두 명이 예전보다 파이를 절반 정도 적게 가져가거나 싸워서 한 명이 파이를 차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의 파이마저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이제는 양보라는 선택지는 사라지며 모두가 모두를 대상으로 ‘입체적 전선’을 펼치는 치열한 싸움만이 유일한 선택지로 남을 뿐이다


최근 뉴스를 살펴보면  사회 전반에 묻지마 범죄에 대한 공포가 만연하고 그만큼 패륜 범죄가 빈번하다. 인간관계는 점차 파편화되고 랜선 관계를 실제 만남보다 더 선호한다. 개인이 조직보다 우선시 되고 불실한 미래의 성공보다는 현재의 성장과 만족이 우선시 된다.

그런데 여기에 개인의 생존을 전제로 한 갈등의 불씨가 던져진다면? ‘모든 개인이 폐쇄된 상황에서 자신의 행복만 추구해 사회 전체의 질서와 도덕이 무너질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수렵시대보다도 더욱 극단적인 약육강식의 시대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미래를 앞두고 지금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부모는 자녀들에게는 어떤 삶의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을까? 기업은 어떤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까? 국가는 어떤 산업을 육성하고 어떤 정책을 필 수 있을까? 인류 역사상 처음 도래하는 수축 사회이기에 누구도 경험한 적 없고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면 도대체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누가 해줄 수 있는 것인가?
저자조차 뚜렷한 해결책은 없다. 그저 공공선을 바탕으로 수축 사회의 도래를 최대한 지연시키며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는 사람의 체계를 세워햐 한다는 것 이상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해결책을 찾기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이기적이다. 갈등은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전 세계와의 갈등을 불사하는 현상이 세계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중 갈등이 그렇고 브렉시트가 그렇다.

개인과 국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자유경제에선 당연한 것이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결국은 자연스레 균형을 찾을 것이라고 여기니 오히려 권장할만한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수축 사회에 들어섬에 따라 보이지 않는 손은 작동하지 않게 될 것이고 ‘개별적으로 타당한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그릇된 ‘구성의 오류’가 발생하며’ 이러한 이기심은 세계경제를 위기로 내몰고 있다.
 
지금의 세계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 결과 이제는 한 지역의 작은 변화가 전 세계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이익,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단순히 한 명의 개인과 하나의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최근 전 세계적인 코로나 사태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중국의 한 지방에서 발생한 질병이 하늘길과 뱃길을 따라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 그리고 각 국가는 백신이 없는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로 말미암아 빗장을 걸어 잠가버렸다. 전 세계적으로 금값은 치솟고 증시는 곤두박질친다. 단순한 바이러스 하나가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국내만 봐도 비슷한 상황이다.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대구는 유령 도시가 되었고 유사 이래 최초로 학교가 문을 닫았다. 여행 업계는 폐업으로 내몰리고 국가 성장률은 1%대로 떨어졌다. 개인의 무지와 이기심으로 시작된 바이러스 확산이 나라를 뿌리부터 뒤흔들고 있다.


이런 현상을 저자는 책에서 대표적인 수축 사회의 현상 중 하나로 보고 있다. 질병과 환경오염이 심해지면서 건강을 지키고 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투입되는 비용이 경제적 효율성을 통해 얻게 되는 효용 가치 이상으로 높아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코로나 사태는 기존 시스템의 허점을 여지없이 보여주면서 현 사회를 유지하는 시스템과 경제논리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는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저하시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개인의 이익을 중시하는 풍토를 더욱 확장시킬 것이다. 
과거에도 메르스, 사스 처럼 유사한 전염병의 확산되었던 일은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코로나는 세계 경제에 이토록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일까? 단순히 전파력이 강해서? 라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렵지만 사회인식이나 분위기, 풍토가 사뭇 결을 달리하는 것 같다. 무언가 변했고 그 변화의 흐름이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수축 사회가 어떤 형태로는 피할 수 없는 예견된 미래라면 온갖 꼼수를 부리고 정신 승리를 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는 삶의 방식을 찾는 게 더 이로워 보인다. 여태 살아온 모든 삶의 기준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지금 적어도 자녀를 위해서라도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나름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 애써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길 위해 적어도 사회적 유대와 정의가 남아 있길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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